김동인의 소설 ‘감자’에서는 중국인 왕서방이 악역으로 나온다. 일제강점기라는 배경을 생각하면 일본인이 아닌 중국인이라는 게 특이할 것이다. 하지만 이건 그리 특이한 일이 아니다. 당시 조선인들에게 있어 중국인 역시 그리 좋은 이미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근대 들어 전세계로 퍼져나간 화교, 그건 조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나라에서처럼 중국인들은 자기들끼리 뭉쳤고 열심히 일했으며, 그 나라의 상권과 일자리를 위협했다. 위의 왕서방이라는 인물은 다른 나라에서 중국인을 묘사할 때도 쉽게 볼 수 있다. 중국 옷을 입고 뚱뚱하며 돈을 밝히는 그런 인물 말이다.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된다. 조선과 청이 맺은 근대적 조약으로, 이를 통해 중국 상인들의 조선 진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일본 상인들이 부산 등 남부지방으로 들어왔다면, 청은 인천 등 북쪽으로 침투해 왔다. 하지만 청일전쟁으로 한 풀 꺾이면서 더 크게 성장하진 못 한다.
그러던 1920년대, 다수의 중국인들이 조선으로 몰려오게 된다. 일본이 조선을 개발하면서 많은 일자리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조선에서 일 할 사람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현재 한국에서 사람이 부족해서 외국인 노동자가 유입되는 게 아니듯 말이다.
1920년대에 사회주의가 들어오면서 조선도 그 영향을 받게 된다. 농촌에서는 소작쟁의가 열렸고, 도시에서는 노동쟁의가 열린 것이다. 이들은 노동시간 단축, 임금 상승 등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게 된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들을 고용하는 이들에게 좋게 보일 수가 없었다. 거기다 이런 조선인들의 움직임이 언제 독립운동으로 발전할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중국인들이다. 허구헌날 파업이나 해대는 ‘게으른’ 조선인들에 비해 중국인들은 말도 잘 듣고 통제도 쉬웠다. 이들은 ‘고력방’이라는 자신들의 조직을 만들었는데, 일본인 자본가들은 이들의 파두(대장)와만 교섭하면 되었다. 중국인 노동자들은 반드시 여기에 가입해야 했고, 통제를 따르지 않거나 탈퇴하는 건 허용되지 않았다. 이 중국인 노동자들은 주로 산동성 출신으로 복건, 광동성 출신이 많은 다른 나라 화교들과는 달랐다. 중국 내의 혼란과 자연재해 때문에 조선에 돈을 벌러 온 계절성 이민자들로 일이 끝나면 돈 쥐어주고 보내면 된다는 장점도 있었다. 총독부에서도 이를 규제하려 했지만 결국 이들의 효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 꽤나 큰 장점이 하나 더 있었다. 이들의 임금을 통해 조선인들의 임금도 동결시키거나 더 낮추게 만든 것이다. 조선인들로서는 이들과의 경쟁을 위해 목소리를 더 낮춰야 했고, 더 나쁜 조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중국인에 대한 반감이 갈수록 커져 갔다. 조선인 노동조직은 중국인 노동자 고용 금지를 요구했고, 이에 맞춰서 각 신문에서는 중구인이 저지른 범죄 등을 알리며 반중감정을 부채질 해 갔다.
한편, 만주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조선 후기부터 조선인들에게 만주는 희망의 땅이었다. 농민들이 먼저 압록, 두만강을 건넜고 중국과 러시아 정부에 골칫거리가 되어갔다. 일제 강점 이후에는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가대로, 땅을 뺏긴 농민들은 농민대로 강을 건넜다. 일제를 피해서 간 이들이든, 일제의 만주 침략에 협조한 이들이든 만주가 희망의 땅인 건 마찬가지였다. 해방 후에도 이런 정서가 남아서 ‘만주 웨스턴’이라는, 미국의 서부극을 본따서 만든 영화들이 유행할 정도였다.
1920년대 후반, 일제의 만주 침략이 본격화 되면서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에서도 쫓겨나게 된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만주 이민은 계속되었다. 총독부도 이를 지원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중국인 노동자들은 조선으로 들어오고 조선인 농민과 노동자들은 만주로 가는 일이 계속되었다. 그럴수록 양쪽의 골은 깊어가게 된다. 조선에서 중국인에 대한 반감이 중국에 알려지고, 만주에서 중국인들의 반감이 조선에 알려지면서 서로간이 분노가 더욱 커진 것이다. 이게 커지면서 1927년에는 전라북도에서 중국 상품의 불매운동이 시작됐고, 그 해 12월에는 익산에서 중국인 상점에 대한 습격사건까지 일어난다.
이런 갈등이 터진 것이 1931년이다.
일본은 중국인을 내세워 미개척지를 얻어내고, 거기에 조선인 농민들을 끌어들인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장소는 길림성 장춘현 만보산으로 일본의 앞잡이 하오융더(학영덕)은 중국 정부의 승인 없이 조선인들을 끌어들였고, 중국인 농민들의 반대에 부닥치게 된다. 일본이 공사를 강행하면서 중국 경찰과 농민들, 일본 경찰과 조선인 농민들이 부딪치게 되었고 발포로 약간의 경상자가 생겨났다. 일단 이 사건은 이걸로 일단락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소식이 조선에 전혀 다르게 알려지게 된다.
"최근 조선에서 발생한 화교 박해사건이 일본인들의 사주를 받아 일어났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사람들이 제시하는 정황증거는 이렇다.
(1) 조선일보 창춘 지국장은 중국인들이 조선인 마을을 습격한 사건에 대해 자극적이고 과장된 기사를 송고했다. 그런데 그는 밀정이라고 알려져 있다.
(2) 조선일보는 호외를 발행했지만, 동일인으로부터 똑같은 소식을 접한 동아일보는 호외를 발행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종로경찰서 형사가 동아일보사에 전화를 걸어 이토록 중대한 사건에 대해 호외를 발행하지 않은 이유를 추궁했다.
(3) 서울의 경찰당국은 조선인들에게 대표자회의의 개최를 허가해주지 않았다. 이 회의는 화교들에게 어떤 행패도 부려서는 안된다고 조선인 주민들을 계도하기 위한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4) 의지만 있었다면, 그토록 유능하고 막강한 경찰이 인천에서 발생한 난동을 못 막았을 리 없다."
- 윤치호 일기 1931년 7월 13일
일본 영사관에서는 많은 조선인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왜곡했고, 조선일보 장춘지국장 김이삼은 이를 본사에 알린다. 조선일보에서 이를 호외로 띄우면서 조선인들의 반화교 폭동이 일어난다. 그 시작은 7월 2일 인천, 이후 경성, 평양 등 화교들이 밀집한 곳에 조선인들이 들이닥쳐 화교를 죽이고 집과 가게를 약탈하고 불태운다. 일주일 후 일본 경찰들이 검거에 나섰을 때 7월 10일 인천에서만 무려 190명이 검거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20대의 젊은이들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용직 노동자들이었다. 즉 중국인 노동자들과 직접 경쟁해야 했던 이들인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충동적으로 폭동에 가담한 이들이었다. 그게 전국으로 퍼졌다는 것은 당시 조선인들의 반중감정이 얼마나 컸는지를 말 해 준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다. 조선과 중국간의 갈등이 심해질수록 이득을 보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조선인 깡패들을 사주해 중국인들을 공격했고, 일본인을 조선인인 척 폭동에 가담, 선동했다. 일본 경찰들은 이 폭동을 방관했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천천히 진압에 나섰다. 그 때는 이미 전국에서 백여명 이상의 중국인들이 피살당한 후였다. 총독부의 발표로도 97명의 중국인이 사망, 118명이 부상당했고, 국제연맹의 조사로는 127명이 사망했고 392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이 사건 두 달 후 만주사변이 일어난다. 일본은 만주를 침략하기에 앞서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 것이다.
조선의 지식인들도 곧 이 사실을 알아챈다. 동아일보는 처음부터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고, 지식인들도 나서서 일본을 규탄하며 반중감정을 누르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처음 소식을 알린 조선일보의 김이삼이 정정보도와 사과문을 올린 후 살해당하는 일이 일어났고, 동아일보에서 보낸 특파원 역시 살해당하였다. 그래도 이런 사건들을 통해 일본의 계략을 알 수 있게 된 게 다행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양 쪽의 상처는 그리 쉽게 봉합되지 않았다. 반일 독립운동에 대한 부분은 다음 해 윤봉길의 의거로 힘을 합칠 수 있게 되었다. 장제스는 크게 기뻐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해 주었고, 이후 해방이 올 때까지 임시정부의 든든한 우군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중국인들과 일자리를 걸고 싸워야 했던 이들은 어댔을까? 이는 현재가지 이어지는 중국인들에 대한 한국인의 반감을 생각하면 쉽지 않을까 한다. 중국인을 돈을 밝히는 왕서방으로 묘사하고, ‘짱깨’라는 비칭으로 부르는 것 말이다. 해방 후에도 화교들을 견제하는 정책이 계속되었고, 화교들은 많은 차별을 받으며 살아 왔다. 이것이 해방 후에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이다.
만보산 사건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는 사건이다. 독립운동으로 본다면 한중 사이를 이간질한 일본으로 볼 수 있겠지만, 외국인 노동자들 문제가 심해지는 현재에는 다른 측면 역시 중요하다. 한국인의 일자리를 뺏으며 한국에 동화되지 않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반감, 그들과의 갈등은 지금 한국의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만보산 사건은 일제의 계략이 있었다 하더라도 한국인이 외국인 노동자 문제로 가해자가 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기억하며 지금의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생각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