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명성황후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다. 그와 함께 명성황후에 대한 미화가 이어졌고, 어떤 주장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기존에 쓰던 민비라는 호칭이 일제가 비하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후 그녀의 공과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면서 호칭 문제는 그녀를 어떻게 보느냐로 갈렸다. 그녀의 공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명성황후를, 과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민비라고 하는 식이다. 공식명칭은 당연히 명성황후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민비가 그녀를 비하하는 의미이며, 쓰면 안 되냐는 것이다.
민비, 민씨 왕비, 간단한 뜻이다. 마치 박대통령처럼 성과 지위를 붙여 쓴 단어다. 전근대시대에 여성은 이름이 없었고 주로 지위에 성을 붙여서 불렀다. 대비가 돼서 존호를 받거나 죽어서 시호를 받은 후에야 구별되는 명칭을 받을 수 있었고, 지금 우리가 조선 왕실의 여성들을 부르는 호칭은 이렇게 생긴 것이다. 왕비의 경우도 왕처럼 중전으로만 불리거나 구별을 위해 성을 붙여 쓴 정도였다. 왕비 역시 왕처럼 중전 등의 호칭으로만 불렸고 다른 왕비와 구분하기 위해서 성을 붙여준 정도였다. 민비처럼 성과 지위로 부르는 건 비공식적인 호칭이었다.
민비라는 성+비로 부르는 것 자체에도 논란은 있다. 일본식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황실 여성은 이름+비로 불리고 그걸 조선에 맞췄다는 것이다. 하지만 매천야록에도 민비와 조대비라는 호칭이 있으며, 민비라는 성+지위가 비하라면 왕비 민씨, 중전 민씨 등 조선에서 불렀던 호칭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문제는 살아있을 때 비공식적으로 불렸던 명칭을 공식명칭이 있는데 써도 되느냐는 것, 그리고 그게 비하냐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경우를 역사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고구려를 건국한 왕은 누구일까? 고주몽이다. 동명성왕이라는 공식명칭으로도 불리지만 이름 역시 많이 쓰인다. 발해를 건국한 왕은 대조영이고 고려를 건국한 왕은 왕건이며 조선을 건국한 왕은 이성계이다. 이들은 모두 이름으로 불린다. 왕건과 이성계는 태조라 겹쳐서 그렇다면 이방원은 어떨까? 태종무열왕은 김춘추지만 그 아들 문무왕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종은 충녕대군이라는 대군 시절의 호칭이 잘 알려져 있고 세조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다른 왕들은 그렇지 않다.
이런 왕들의 공식명칭은 모두 ~왕, ~조/종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름부터 대군 시절의 호칭이 잘 쓰이고 있고, 이에 대해 비하 논란은 일어나지 않는다. 세조의 경우 쿠데타로 집권했기에 수양이라는 호칭을 비하로 쓰기도 하지만, 비하가 아니더라도 쓰이는 경우 역시 많다. 공식명칭을 쓰지 않아서 비하라면 이들 모두 비하일까? 오히려 왕이 되기 전의 일들이 유명하기에 이름이 통칭으로 남은 것이다.
명성황후와 동시대로 가면 어떨까? 흔히 우리가 대원군이라 부르지만 이건 자신은 왕이 아니면서 아들이 왕이 된 사람이 받는 군호이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공식적인 시호는 흥선헌의대원왕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으며 대원군, 아예 이름인 이하응으로 부르는 경우도 많다. 비하를 위해 격이 낮은 호칭을 쓸 순 있겠지만, 격이 낮은 호칭을 쓴다고 무조건 비하는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하응은 야인 시절 그의 야망을 묘사할 때 자주 쓰이지 않는가.
명성황후 호칭 논쟁과 가장 잘 비교할 수 있는 건 바로 신정왕후이다. 그녀의 공식명칭은 신정익황후, 하지만 황후도 아닌 왕후가 더 잘 쓰이며, 그보다 더 잘 쓰이는 건 대비 시절의 호칭이다. 조씨 대비, 조대비가 그녀이다. 민비가 비하라고 주장했던 드라마에서조차 신정왕후에 대해서는 조대비라 불렀다. 마찬가지로 명성황후 사후 황후 대접을 받았던 순헌황귀비 역시 엄귀비라 불리며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민비, 조대비, 엄귀비, 비하라면 이 모든 게 비하이고 아니라면 모두 아니다. 그렇다면 이 중 하나만 비하라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여기서 한 가지 분노가 담긴 이유가 들어간다. 그녀가 일제의 손에 죽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걸로 저 셋 중 그녀의 호칭만 비하가 될 수 있을까?
일제가 그녀를 부르며 비하의 의미를 담은 건 사실일 것이다. 일제는 그녀를 큰 장애물로 여겼고, 무리수를 쓰면서까지 제거했다. 그런 적을 비하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그 호칭 자체를 거부할 이유는 없다.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일본은 한국 자체를 비하하는 말을 쓴다. 조센징이라는 유명한 말이다. 하지만 이 뜻 자체는 조선인이다. 일제가 이 말을 비하의 의미로 쓴다고 '조선인'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아야 될까? 강점기 동안 일제는 우리 역사를 낮추려고 최대한 노력했고, 그들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은 없다. 그렇다면 일제의 손이 닿았다고 우리 역사에 있던 모든 용어를 바꿔야 될까?
앞으로도 그녀의 공과에 대한 논란이 계속될 것이다. 그녀의 공식명칭인 명성황후 역시 변하지 않고 남을 것이다. 하지만 공식명칭이 아니라고, 혹은 일제가 불렀다는 이유로 널리 쓰이던 호칭이 한순간에 쓰면 안 되는 비칭으로 바뀌는 것은 동의할 수 없다. 특히 그것이 다른 사례들을 종합한 결론이 아닌 한 사람의 미화만을 위한 것이라면 있으면 안 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