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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가브리엘과 의로운 루시퍼가 보여주는 선악의 아이러니

-Sufjan Stevens의 <John Wayne Gacy Jr.>와 Marilyn Manson의 <Get your Gunn>

 

eerie (http://patricidaljubilee.egloos.com/)

 

 

서프잔 스티븐스의 <John Wayne Gacy Jr.>는 어느 누가 들어도 ‘얌전하게’ 들리는 노래다. 사운드 면에서만 보면 걱정 많은 부모님들이 사춘기 자녀들의 이어폰에서 언뜻 듣게 된다고 해도 문제없이 넘어갈 만한 서정적 포크송이기 때문이다. 피아노와 어쿠스틱 기타가 침잠하듯 하강하는 코드 진행을 그려내며 절제된 톤으로 진행되는 이 노래는 그러나, 서프잔의 섬세한 보컬이 한 가정의 모습을 묘사하기 시작하면서 다소 심각해진다. “그의 아버지는 술주정꾼이었고 어머니는 침대에서 울고 있었네…” 처음부터 심상치 않게 시작한 가사는 ‘그’가 “땅 밑에 숨겨 놓은 썩어가는 27명의,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로 이어지고 서프잔은 급기야 작은 탄식을 내지른다. “그들은 여름방학 아르바이트를 하러 온 소년들이었어. 오, 세상에!”

 

존 웨인 게이시 주니어. 지난번 칼럼에서 다룬 찰스 맨슨이 ‘반문화 저항가’의 가면을 쓴 연쇄살인범이었다면, 게이시는 반대로 ‘중산층 명망가’의 가면을 쓴 연쇄살인범이었다. 비록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긴 했으나 그는 겉으로는 평범한 결혼생활을 영위한 성공한 사업가였고, 동네 사람들에게는 지역 자원봉사에 열심히 참여하는 훌륭한 이웃이었다. 지금도 인터넷에는 그가 영부인 로잘린 카터와 함께 촬영한 기념사진이 흔하게 돌아다닌다. 서프잔이 섬세하고 내밀한 포크 넘버를 통해 이 ‘더럽게 위선적인’ 살인마를 노래한 이유는 무엇일까. 서프잔이 그의 범죄 행각을 관조적으로 묘사한 후 내뱉는 마지막 자기고백은 사뭇 충격적이다. “나도 사실은 그와 같은 인간이야. 내가 마루 밑에 숨겨놓은 비밀들을 봐.” 서프잔은 2009년 인터뷰에서 이 가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모두는 게이시가 한 짓을 할 수 있다. (We're all capable of what [Gacy] did.)”

 

게이시는 서프잔의 두 번째 ‘미국지리’ 콘셉트 앨범인 <<Illinois>>의 일리노이 주가 낳은 가장 유명한 연쇄살인범이지만, 서프잔의 영감을 자극한 것이 단지 게이시의 출신지역 만은 아닐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것으로 유명한 서프잔에게 위선의 상징과도 같은 게이시의 캐릭터는 처음부터 ‘대놓고 탕아’였던 찰스 맨슨보다 더 의미심장한 숙고의 대상이 되었을 법하다. ‘우리 모두 게이시가 한 짓을 할 수 있다’는 서프잔의 말은 신의 이름으로 누군가의 악행을 심판하는 자신감을 표출하기보다는 ‘신 앞에서 모두 같은 죄인’일 수밖에 없는 피조물의 한계를 담담히 인정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렇다고 서프잔의 말이 ‘인간은 원래 모두 그렇다’는 식의 맹목적 성악설로 게이시를 변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be capable of’라는 표현에 실린 물리적 느낌은 인간 본질에 대한 싸구려 회의를 나타낸다기보다는 인간의 타락 가능성에 대한 서프잔의 겸허한 태도를 드러내는 것에 가깝다. 피해자들의 비극에 대해 탄식한 후 등장하는 “당신도 그들 중 하나인가요?”라는 가사가 뒤의 “나도 그와 같은 인간”이라는 가사와 대구를 이루면서 보여주는 그의 세계관 역시 그렇다. 누구나 가해자도, 피해자도 될 수 있는 인간의 나약하고 슬픈 운명. 신본주의적 세계관에 기독교 특유의 원죄 의식이 어우러진 이런 관점은 서프잔에게 잔잔한 일상 속에 숨겨져 있을 수 있는 무한대의 지옥을 보게 했을 것이고 ‘아름다워서 더 섬뜩하다’는 평을 듣는 이 노래의 창조적 동력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자연인의 목소리로 소탈하게 자신의 위선을 고백하는 신실한 종교인 서프잔과 정반대로, 요란한 위악적 악마성의 표출을 예술적 전략으로 삼는 뮤지션들도 있으니 그 대표적인 이가 바로 마릴린 맨슨이다. 누가 봐도 ‘나는 악마요’라고 만천하에 외치는 것만 같은 사악한 분장과 차림새, 웬만한 학부모들은 기겁하며 뒤로 넘어갈 과격한 사운드와 가사 속에 난무하는 욕설. 마릴린 맨슨이 본격적으로 뜨기 전 발매한 앨범 <<Portrait of an American Family>>에 수록된 싱글 <Get your Gunn>을 들어보면 마릴린 맨슨이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짝짝이 렌즈와 창백한 분장을 완성하기 이전부터 ‘위악’을 분명한 콘셉트로 삼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빌어먹을 네놈의 정의로운 손길. 난 죄 없는 자의 고기를 먹겠어. 가정주부를 두들겨 패겠어. 프로라이프(pro-life)를 죽여 버리겠어. 네가 안 하는 짓을 난 할 거야.”

 

속된 말로 중2병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위악적으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그러나 뒤로 갈수록 의외의 면모를 드러낸다. “난 내 자신을 때려야 잠이 들어. 난 네가 뿌린 씨를 거둬야 돼. 난 자해를 하지. 난 내가 내 자신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타인에 대한 공격성과 자학성의 동시다발적 표현, 그 기저에는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사실 이 노래는 마릴린 맨슨 자신이 ‘최악의 위선적 행각’으로 지목한 낙태 반대론자(pro-life)에 의한 산부인과 의사 살인 사건을 겨냥한 것으로 가사 자체가 임신한 10대 소녀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곡이다. <Get your Gunn>이라는 제목은 낙태 집도를 하다가 반대론자들에게 살해당한 의사 ‘David Gunn’의 이름을 따 중의적으로 지은 것이다. 나쁜 짓을 골라 하겠다는 초반의 위악적 다짐은 노래가 진행되면서 점차 ‘진짜 나쁜놈은 네놈’이라는 고발을 위한 밑밥이 된다. 자신이 정의롭다고 믿는 이들의 위선에 대한 마릴린 맨슨의 신랄한 폭로는 후렴구에서 절정을 이룬다. “당신의 선택적 심판과 ‘좋은 사람’ 증표 따위는 나한테 *도 의미 없어. (Your selective judgements and good guy badges don't mean a fu** to me.)” 서프잔이 살인마 게이시의 이야기로 시작해 자신에 대한 근원적 반성으로 나아갔다면, 마릴린 맨슨은 반대로 자신의 위악을 먼저 표출한 후 그 기원이 된 ‘진짜 악’을 폭로한 것이다.

 

신실한 종교인은 악에 대한 고찰 끝에 스스로를 악마로 칭하고, 사탄의 자식을 자처하던 이는 거꾸로 악에 대한 심판에 앞장서게 되는 아이러니.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영화 <콘스탄틴>에서 대천사 가브리엘은 인간을 고귀하게 만들어 준다는 핑계로 일부러 인간들을 고통 속에 빠뜨리는 음모를 꾸미고, 주인공 콘스탄틴은 대담하게도 이를 루시퍼와의 거래로 막아낸다. 선악 구도의 역설은 시간여행의 역설만큼이나 끝없는 모순을 만들어낸다. 서양의 교부들은 오래 전부터 ‘신은 왜 악을 창조했는가?’, 혹은 ‘신은 왜 악마를 창조했는가?’란 질문을 던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애초에 실체가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선악이라는 것이 태초에 입력된 프로그래밍에 의한 기계적 결론일 수 없다면 악마 역시 현재진행형으로 거듭 재창조되는 개념이며, 중요한 것은 악이 시시각각 옷을 바꿔 입고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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