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시 칼럼] 정기룡

by 호솜 posted Sep 14,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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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시칼럼 - 정기룡


임진왜란 때 열심히 싸웠음에도 알려지지 않은 위인이 있다. 최근 들어 소설을 통해 재평가가 시작됐고, 인터넷에서 그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6060승의 불패의 명장, 육지의 이순신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엄청난 공을 세우고도 인정받지 못 했다고 한다. 소설의 저자는 그가 왕권을 위협할 정도의 젊은 장수이기에 그랬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기에 1605년에 이순신, 권율, 원균과 함께 선무 1등 공신에 올랐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우선 당시 공신을 정할 때를 찾아보자. 160334일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공신도감에서는 이순신, 권율, 원균, 권응수 등을 하나로 묶고 김응서, 고언백을 하나로 묶었다. 이어 권응수를 언급했으며 정기룡은 그 다음이다. 그리고 정기룡과 함께 언급된 한명련 등 5명은 그와 마찬가지로 선무공신에서 제외되었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었던 1605, 그는 1등공신이 된다. 하지만 그건 이순신, 권율, 원균에 이은 1등공신이 아니었다. 선무공신보다 급이 낮은 선무원종공신이었다. 그 수는 무려 9060명으로 곽재우, 정운, 이영남, 조헌, 고경명 등 익숙한 인물들이 포함돼 있다. 결정적으로 선무공신이 뽑힌 것은 1604, 선무원종공신이 뽑힌 것은 그 다음해였다. 저자의 말처럼 뒤늦게 재평가 받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몰랐을까? 아니면 알면서도 왜곡한 것일까?

 

무력을 보유한 무관은 언제나 견제의 대상이었다. 임진왜란 때도 마찬가지였다. 선조는 선무공신을 단 18인만 뽑으면서 전방에서 싸운 이들보다 자신을 호위하고 명군을 부른 이들의 공이 더 크다고 했다. 무관들은 언제나 견제 당했고, 정치적인 계산에 의해 공이 부풀리고 깎였다. 이순신이 왜란 동안 당한 고난과 원균이 1등공신에 오른 것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기룡도 이 중 하나일 순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딱히 왜곡을 하지 않더라도 그의 공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열심히 싸운 훌륭한 장수임에는 틀림이 없다. 상관인 조경을 구하고 상주성을 탈환하는 등의 활약을 보여줬고, 휴전 후 경상도의 민심을 다독이는 토포사에도 그가 임명되었다. 싸움 뿐 아니라 백성들을 위로하고 다스리는데도 능했다는 것이다. 이후 정유재란 때 경상 우병사에 임명된다.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때였다. 조정은 물론 명군에서도 인정을 얻었고, 정유재란 동안 경상도에서 활약 한다. 하지만 마음만큼 싸우긴 힘들었을 것이다. 육군은 명군의 통제 하에 있었고, 왜성에 틀어박힌 소수의 일본군과 소규모 전투만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군이 동원된 사천성 전투에서는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대패한다. 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의 전공은 이 정도이다.

 

걸리는 문제 역시 적지 않다. 난중잡록 등 다른 사료에서 교차검증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그의 행장에만 나오는 전공이 많다. 이런 개인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거기다 실록에는 항왜를 죽이고 적의 목을 벤 것처럼 허위보고한 일도 있었다. 이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하고, 그게 선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육지의 이순신이라는 수식어는 너무 거창해 보인다.

 

무엇보다 그의 전공보다 6060승이나 조정의 견제에 의해 묻힌 명장이라는 과장이 더 퍼진 것이 문제이다. 육지의 이순신이라는 칭호는 어느 사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그의 재평가 과정에서 나온 말일 뿐이다. 그리고 그를 비롯한 어느 장수들의 활약도 이순신에 비하면 부족한 게 사실이다. 또한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르고 시호까지 받은 인물을 가려졌다는 건 지나치지 않을까? 누구에 의해 가려졌다기보단 우리의 무관심이 문제가 아닐까?

 

임진왜란 때 관군은 주로 패하고 도망갔다는 인식이 많고 주요 관심은 의병으로 기운다. 관군의 유격전은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고, 특히 정유재란 때의 활약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의병으로 누구보다 유명한 곽재우가 정유재란 때 어떤 활약을 했는지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그리고 멀쩡히 종전을 맞이한 이들보다 전사한 이들이 더 눈에 띄기 마련이다. 관군이었고 유격전으로 결정적인 대첩을 세우진 못 했으며, 정유재란 때 주로 활약한데다 임란 후에도 벼슬살이를 했던 것이 정기룡이다. 아쉽지만 임진왜란을 다룰 때 전면에 내세우긴 힘든 인물인 것이다.

 

그렇기에 나라를 위해 싸운 이들은 관심을 가지고 찾아봐야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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