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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함께하는 시대의 목소리, 김현식

예술인, 즉 아티스트의 혼은 남다르다. 그들이 걸어온 길은 과정과 결과에 더해져 대중을 이끈다. 그 과정이 아름답다고 하기에는 지나치도록 결과가 안타까운 아티스트가 있다. 김현식.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23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가 보여줬고, 남긴 음악과 삶을 향한 열정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우리 곁에 남겨져 있다. 그가 생전에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녹음한 감동과 눈물이 함께하는 21곡의 미발표곡과 신곡이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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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 시대의 흐름 속에서 피고 진 가객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급변하고 위태롭던 사회의 움직임 속에서 젊음이들의 패기와 의기는 음악에 준해서 더해졌고 또한 이어졌다. 당시의 음악은 사회의 변화만큼 다채롭게 요동쳤다. 시대를 통틀어 감정을 테크닉에 실은 알찬 음악이 등장했고, 지금에는 상상도 못할 뮤지션과 그룹, 가수들의 음반을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때였다. 미디어의 역할도 음악에 있어서는 대중들에게 평온하게 열려 진행되던 시절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장르의 폭과 깊이를 흡수한 대중들은 유연하게 매니아나 나름의 전문가가 될 수 있었다. 유명세를 떨치고 최상의 길을 걸어오던 해외 뮤지션의 음악, 그리고 이보다 더 정교하게 다듬어져 대중들에게 다가갔던 당시 국내 음악계에서 유독 돋보이던 한 뮤지션이 바로 가객 김현식이다.



1980년 데뷔했던 그가 참여했던 많은 앨범들과 6장의 솔로 작품들. 싱어 송 라이터의 개념을 굳혔고, 솔로가수의 대중화를 열었으며, 대한민국의 순수한 음악적 계보를 이어줬던 김현식. 굳이 남다른 음악과 테크닉을 앞세우지 않았음에도 대중들은 시간을 거듭할수록 그에게 빠져들었다. 왜였을까. 이유는 단순했다. 당당함이 엷게 배인 목소리와 순수함이 깃든 눈빛, 그리고 보이지 않게 담겨진 음악의 풍성함이 큰 이유였다. 하지만 김현식의 그 단순함을 다른 음악인들은 흉내낼 수 없었다. 어떤 이유였을까. 그가 가진 음악이라는 삶의 무게는 그를 아끼고 사랑했던 많은 이들의 동경과 경외감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은 누구보다 음악을 향한 진보적 기취를 섬세하게 지니고 있었고, 음악과 그 음악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걸었던 혼신의 연속이었다.



자신이 지닌 능력의 힘을 다해 새로운 영역을 완성해서 대중적으로 성공했던 가수. 블루스와 소울, 그리고 록과 블루스의 열정을 한국적 소리로 담아내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뮤지션. 불꽃보다 더 휘황찬란한 열정을 통해 아티스트로 기억되는 김현식. 그를 연상할 때 많은 사람들은 ‘불세출의 가수’, 혹은 ‘너무나 짧게 생을 마친 비운의 가수’라는 공통되면서도 분리되는 이미지를 연상한다. 김현식의 삶은 음악 이전, 호흡의 마디를 순결하게 완성시킨 신성이었다. 시대는 그를 이끌어냈고 그는 스스로를 발견했으며, 대중은 그를 온전히 포용했다. 그가 서른셋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남긴 결과물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더욱 아름답게 승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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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김현식과 가수 김현식의 삶

김현식은 1958년 1월 7일 서울에서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사업 관계로 충북 옥천에서 성장을 하던 김현식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오게 된다. 잦은 전학은 어린 김현식에게 홀로서기와 외로움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 인연이었을까. 성장 이후 1980년대 대한민국 음악의 성장을 위해 함께 뛰었던 들국화의 전인권은 그가 전학을 온 학교에 2년 선배로 재학중이었다. 김현식은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고집이 세고 독기 가득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어린 시절 형성된 그의 성품은 이후 음악생활과 생의 마지막에 영향을 끼쳤다. 전교 4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면문 보성중학교에 입학한 김현식은 그 즈음에 기타를 처음으로 만지기 시작했다. 당시 즐겨 듣고 연주하던 음악은 비틀즈의 ‘Oh Darling', 호세 펠리치아노의 ’Once There Was A Love‘, CCR의 ’Proud Mary' 등으로 다분히 블루스와 포크에 기반한 음악에 일찍 귀가 열렸다. 이후 전교 3등의 성적으로 명지고에 입학한 김현식은 밴드부에 가입을 하고 잠시간의 방황기를 거치며 음악에 대한 꿈을 본격적으로 형성하기 시작했다.?



대입검정고시 학원을 다니면서 종로의 음악다방 ‘벌판’에서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고, 명동의 쉘부르와 썸씽에도 출연을 하게 된다. 국제호텔 나이트클럽에 출연을 하던 당시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당시 김현식은 이장희의 동생 이승희와 김동환 등과 순차적인 듀엣 활동을 이어 나왔고, 이장희가 진행하던 ‘0시의 다이얼’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등 기반까지 닦았다. 그러나 1978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된 그는 8개월간 복역을 하게 되었고, 깊은 시름에 빠지게 된다. 그럼에도 김현식이 의지할 수 있는 건 음악뿐이었다. 명곡 ‘봄여름가을겨울’은 그 시기에 완성된 곡이다. 이후 평소 그의 음악성을 지켜보던 이장희의 소개로 서라벌 레코드에서 데뷔작을 준비했고, 때를 기다리던 음반사는 이미지 쇄신을 위해 2년 후인 1980년 그의 데뷔 앨범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후 결혼을 하게 된 김현식은 음악을 통한 현실의 안정을 위해 노력을 다했다. 소속사를 동아기획으로 옮긴 그는 거의 전곡을 자신이 완성시킨 2집 앨범을 발표한다. 앨범 내에서 ‘사랑했어요’ 등의 몇 곡이 다운타운가에서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하며, 자신의 이름을 대중들에게 확실히 인식시키기에 이르렀다. 2집의 성공에 고무된 그는 자신만의 그룹을 결성하고자 준비를 하게 된다. 때를 즈음해서 김현식은 들국화 그룹 결성 이전의 전인권과 동방의 빛을 결성해서 활동했고, 정성조와 메신저스에서 싱어를 담당하기도 했다. 이후 자신의 이름과 데뷔 타이틀을 내걸고서 조직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은 김종진, 전태관, 박성식, 장기호, 그리고 유재하가 순차적으로 멤버로 구성되었다. 이 멤버들은 이후 각기 봄여름가을겨울과 빛과 소금, 솔로 가수로서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3집 앨범은 동아기획의 프로모션 기획에 맞춰 방송보다는 콘서트와 라이브를 통해 현장에서 대중들과 호흡하는 시간에 중점을 두었다. 당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의 현장에 주한 활동은 들국화와 함께 대중들 속에서 생생하고 살아있는 음악을 들려주는 콘서트 문화를 정착시킨 선구적인 의미를 지녔다. 이 시기 김현식은 돌개바람을 새롭게 결성해서 이원화된 활동을 잠시 이었다.?



1986년 김현식은 연세대 앞에 위치한 클럽 레드 제플린에서 잼 형식의 공연을 자주 진행했다. 당시 주로 함께 연주를 했던 이들은 이정선과 엄인호, 한영애, 정서용 등 실력과 음악적 기개를 지닌 가수들이었다. 이들과 함께 김현식은 소위 언더그라운드라고 불리던 1980년대의 인디펜던트의 중심에 섰으며, 그만의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뮤지션 사이에서까지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발표된 3집은 그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비처럼 음악처럼’과 유재하의 작품인 ‘가리워진 길’ 등을 수록하며 다시 한 번 그를 최상의 가수로 확장시켰다. 음악성과 대중성이 교차한 이 앨범은 판매 면에서도 엄청난 기록을 남기게 되었고, 김현식은 새로운 곡에 대한 작업과 연습, 수많은 라이브를 통해 자신의 음악인생에 있어 최고의 전성기를 보낼 수 있었다. 성공 뒤의 침체기, 1987년 대마초 상용 협의로 다시 한 번 구속된 김현식은 2개월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삭발을 하는 등 참회의 시간을 갖게 된다. 자신의 음악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에 봉착했던 그는 재기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사건 이후 최초의 콘서트이자,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를 갖게 된다. 이 날 공연 현장에는 6천 명이 넘는 관객이 모여 그의 재기를 위한 갈채를 보내줬다. 당시 팬들의 열성적인 응원에 ‘비처럼 음악처럼’을 부르던 그는 진실된 반성과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당시 저력있는 음악상이자, 앨범 판매량을 중심으로 수상자를 선정하던 일간스포츠의 ‘골든디스크’를 언더그라운드 가수로는 최초로 수상하면서 평론가들에게마저 인정을 받게 되었다. 1988년 기존 음악에 변화를 주기 위해 블루스와 소울을 가미한 4집 앨범을 발표하며 성공의 연속을 이었다.?



1989년에는 ‘환상’과 ‘골목길'이 수록된 신촌 블루스의 2집 앨범에 참여하며 자신의 음악적 기개를 다시 한 번 다지게 되었다. 또한 건강 악화 속에서 신형원, 강인원, 권인하 등과 함께 옴니버스 영화앨범 [비오는 날의 수채화]에 참여하며 가요계 전체를 ’김현식 천하‘로 이끌었다. 이러한 성공에도 부끄러움과 절박한 창작의 고민을 갖던 그는 술에 의지하는 시간이 갈수록 더해졌다. 건강에 대한 주위의 우려 속에서 1990년 자신의 삶을 반추해보는 5집 앨범을 발표하며, ‘넋두리‘와 ’그 거리 그 벤취‘ 등을 히트시켰다. 하지만 그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덧씌워진 상태였다. 절대 안정과 금주를 주문했던 병원과 주변의 만류에도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이들과 음악을 남겨두고 떠나야한다는 불안감 때문에 곧장 다음 앨범에 대한 작업에 매진하게 된다. 그러나 마지막 투혼을 발휘하듯 병실에서 녹음을 하는 등 최상의 노력을 다하던 김현식은 6집 앨범이 채 완성되기도 전인 1990년 11월 1일, 너무나 큰 안타까움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내 사랑 내 곁에’가 담긴 6집 앨범은 그가 남긴 과거의 곡들로 채워져 유작 앨범으로 발표되었고, 1991년 2월 9일 그를 기리기 위한 63빌딩 추모콘서트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의 노래를 함께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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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 음악의 의의

김현식의 등장은 한국 대중음악계에 있어서 음악적 의의가 매우 크다. 1970년대 한국대중음악은 미 8군 출신 뮤지션들을 중심으로 하는 그룹 사운드의 등장과 그 팀의 리더들의 솔로화를 통해 불씨를 피웠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1970년대 후반 정치적 공황과 사회적 암연으로 인해 대중들과의 맥이 끊기고 말았다. 이같은 혼란기에 진취적인 ‘음학’의 포용을 이룬 김현식은 들국화와 함께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시작을 알렸고,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그 끝을 맞이했던 뮤지션이었다. 포크 음악을 주무기로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맏형이었던 조동진이 이끄는 하나기획 사단과 한국적 록음악과 블루스, 소울 등을 통한 대중음악의 성공을 이뤘던 대장 김영의 동아기획. 그 축에 가장 큰 기름칠을 했던 인물 역시 김현식이었다. 그는 언더그라운드에서의 성공에 안위하지 않았으며, 라디오와 TV 등의 미디어와 라이브 콘서트를 동시에 섭렵했던 최초의 뮤지션이기도 했다.



음악 내적으로 김현식은 블루스와 록음악을 기반으로 포크와 발라드, 퓨전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고 감도 높은 음악을 연출해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친화력은 한국 대중음악의 계보를 이으며 새로운 틀을 형성했다. 대가수 유재하는 물론 자신의 그룹이었던 봄여름가을겨울의 독립과 빛과 소금의 성공으로 이어진 김현식의 음악은 수많은 후배 뮤지션들의 구심점이었다. 또한 엄인호, 한영애, 이정선 등과 같은 선배 동료 뮤지션들과 함께 한국 블루스 음악의 커다란 축인 신촌블루스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동아기획과 함께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대중화를 이끈 아티스트 김현식. 그의 음악과 생명이 끊긴 1991년. ‘내 사랑 내 곁에’가 담긴 그의 유작 앨범이 발매된 다음해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대중가요의 흐름은 뒤바뀌고 말았다. 자연스럽게 동아기획과 하나기획은 서서히 과거 영광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사의 유적처럼 김현식이 남긴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갈무리는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져 나오고 있다.





리뷰

1집 [김현식 새 노래]

이 앨범은 그의 음악에 대한 ‘사계’가 시작된 작품이다. 엄밀히 1978년 완성된 이 앨범은 레코드사측의 프로모션 플랜에 의해 2년 후인 1980년에 발매되었다. 먼저 김현식의 데뷔곡이자 훗날 그가 결성한 그룹의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한 ‘봄여름가을겨울’이 첫 번째 곡으로 수록되어 있다. 김현식이 스무 살에 완성한 ‘당신의 모습’은 그가 특히 애착을 갖던 곡으로 어딘가에서 그에게 노래를 불러 달라고 하면 항상 부르던 곡이다. 노랫말은 연상이었던 첫사랑을 그리며 완성되었다. 또한 이 곡은 그의 2집 앨범 에도 수록되었으며, 그의 노래비에도 노랫말로 남겨져 있다. 그의 데뷔 앨범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운명’과 ‘아베 마리아’의 수록에 있다. 곡이 부족한 상황도 아니었음에도, 이 두 곡의 경음악 버전은 앨범의 맥을 끊기게 했다. ‘주저하지 말아요’는 이후 방미와 박미경 등이 리메이크 발표한 바 있으며, 마지막 곡이자 건전가요인 ‘아름다운 노래’는 장미화의 버전으로 담겨져 있다.



2집 [김현식 2집]

김현식이 생전 한 인터뷰에서 “1집이 가수로서 음반을 내고 데뷔하는데 의미를 뒀다면, 2집은 한명의 가수로서 이제 자신의 음악을 펼쳐간다는 의미를 지녔다.”고 밝힌 2집 앨범은 서라벌레코드에서 동아기획으로 소속으로 옮겨 발표되었다. 당시 동아기획은 들국화를 방송에 의지하지 않고 라이브 무대만으로 대단한 인기를 모으고 있던 의식있는 프로덕션이었다. 동아기획은 무명이지만 김현식의 음악적 가능성에 큰 기대를 걸었고, 김현식은 동아기획이라면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세계를 가장 이해해 줄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동아기획과 김현식은 역사적인 결합을 이루게 되었고, 이들의 만남은 기대 이상의 결과로 이어졌다. 데뷔앨범에서도 몇 곡의 자작곡을 수록했던 김현식은 2집에서 10곡 중 9곡을 작곡해서 실력파 싱어송라이터로 확고한 자리를 굳혔다. 대한민국 대중가요의 최대 명곡으로 손꼽히는 ‘사랑했어요’는 다운타운가에서 맹위를 떨치다가 서서히 수많은 대중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애처로운 가사와 기타의 발란스가 돋보이는 ‘어둠 그 별빛’과 최이철의 기타가 인상적인 ‘아무말도 하지말아요’, 그리고 작사가 양인자의 노랫말이 인상적인 ‘바람인줄 알았는데’ 등이 꾸준하게 다운타운가를 중심으로 인기를 모았다. 사랑과 외로움이라는 공통 요소가 가득한 이 앨범은 김현식을 대중에게 안착시킨 앨범으로 기록되고 있다.



3집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그룹이라는 조직을 통해 자신의 음악을 향상시키고 소화해서 선보이고 싶었던 김현식은 1985년 김종진과 전태관, 장기호, 유재하 등 쟁쟁한 연주자들과 함께 그룹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을 결성하고 3집을 발표했다. 앨범 작업 이전 유재하는 그룹을 탈퇴했고 박성식이 참여했다. 하지만 3집에는 유재하의 작품 ‘가리워진 길’이 수록되어 있으며, 탈퇴 이후에도 김현식과 유재하의 음악 외적인 동질감은 꾸준하게 이어졌다. 단순한 세션의 개념이 아닌 제대로 된 밴드의 음악을 구사하고자 했던 김현식은 이 앨범을 통해서 재즈와 블루스와의 조화를 이뤄냈다. 가사의 주제는 여전히 사랑과 외로움이 주를 이룬다. 매끈한 멜로디와 스잔한 가사가 어우러진 ‘슬퍼하지 말아요’와 ‘우리 이제’, ‘비오는 어느 저녁’. 김현식의 대표곡이자, 김종진의 솔로 프레이즈가 매력적인 ‘비처럼 음악처럼’ 등이 히트를 이룬 3집은 30만 장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다.



4집 [김현식 Vol. 4]

4집 앨범 발표 전후 김현식은 봄여름가을겨울의 해체, 새로운 그룹 돌개바람을 결성해서 잠시간의 외도, 그리고 신촌블루스와의 조우 등의 음악적 흐름을 이어왔다. 개인적으로는 어머니와 가족의 캐나다 이민과 부인과의 별거로 인해 심약해진 상태에서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되기까지 했다. 이처럼 절치부심의 심정이 배가되고 다듬어진 음악이 담긴 앨범이 바로 4집 앨범이다. 이 앨범은 이병우의 프로듀싱과 송홍섭의 편곡, 박청귀의 기타가 가미되어 빛을 더했다. 이전까지의 보이스 칼러에서 보다 더 허스키한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는 김현식은 유재하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담은 ‘그대 내 품에’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앨범이 발표된 1988년은 변진섭과 이승철의 등장으로 솔로 가수의 전성기가 시작된 해였다. 이 틈바구니 속에서 김현식은 자신의 음악에 감각적이고 세련된, 또는 호소력있는 작품을 싣고자 노력했고, 이는 ‘비처럼 음악처럼’과 ‘언제나 그대 내곁에’를 통해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로큰롤 비트가 삽입된 ‘우리네 인생’과 그의 사후 라디오를 통해 전파를 많이 탔던 하모니카 연주곡 ‘한국사람’ 역시 좋다. 그리고 5집과 6집의 김현식표 감성이 여리게 전해지는 ‘우리 처음 만난 날’은 아름다움과 슬픔이 공존한다. 앨범 발표 이후 김현식은 신촌블루스와의 연대를 강화하며 자신의 음악적 변화에 블루스를 본격적으로 가미하기 시작했다.



5집 [김현식 5]

“나는 나의 음악을 정리한다는 의미의 5집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집이 나의 음악의 시작이고 그 뒤의 앨범들이 나의 음악을 진행시켰다면, 이제 5집으로 한 시기의 나의 삶과 음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고 김현식은 앨범 발매 당시의 한 인터뷰에서 5집 앨범에 대한 정의를 밝혔다. 김현식의 건강에 이상이 오기 시작하며 제작된 이 앨범은 사랑과 외로움을 벗어난 김현식의 삶을 바라보는 감성이 가득 실려 있으며 모든 수록곡에 시적인 가사가 거칠게 녹아있다. 신촌블루스의 3집 앨범과 동시에 제작된 이 앨범은 김중만의 자켓사진처럼 그의 음악과 인생이 가득 담겨져 그의 고통이 전달되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앨범은 김현식 음반 가운데 가장 음악적으로 충실했던 앨범이기도 하다. ‘향기없는 꽃’은 하이톤에서 더욱 빛이 나는 김현식의 굵은 보이스가 인상적인 곡으로 안치환에게 영향을 끼친 넘버이기도 하다. 김현식의 혼이 시린 ‘넋두리’는 침잠하는 한 인간의 절규다. 인생의 뒤안길을 걷는 김현식의 모습이 떠오르는 ‘그 거리 그 벤취’와 ‘거울이 되어’는 너무나 허탈하고 쓸쓸하다. 5집 앨범은 눈물겨운, 또한 격렬한 에너지로 점철된 김현식의 삶이 거친 음색에 고스란히 담겨져있는 앨범이다.



6집 [Kim Hyun Sik Vol.6]

“함께 얘기를 나눌만한 친구들이 없다.” 김현식이 세상을 떠났을 때 모 방송의 추모 프로그램에서 그의 일기 가운데 낭송되던 구절이다. 김현식의 유작 앨범으로 남게 된 이 앨범의 녹음 당시만 하더라도 김현식은 병원에 가만히 누워있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병원에서 몰래 나와서 노래를 부르고 녹음을 했다. 그는 결국 앨범의 완성 이전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지우들이 미완의 이 앨범을 끝마쳐서 발표되었다. 어쩌면 이 앨범은 적잖은 그의 헌정 앨범 가운데 그가 참여했던 유일한 '자신의 추모 앨범'이라 할 수 있다. 이 앨범에는 김현식 최초의 히트곡 '사랑했어요'와 그룹 사랑과 평화의 '겨울 바다'가 새롭게 리메이크되어 수록되어 있다. 이전 발표되었던 곡들과 달리 관조적인 시선이 강하며, 그가 만든 '추억 만들기'와 '사랑, 사랑, 사랑'의 낙관적인 시선은 의외로 담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 앨범은 대한민국 100대 명곡에 선정된 ‘내 사랑 내 곁에’가 타이틀곡이다. 이 곡은 기타리스트이자, 작곡자 오태호의 작품이다. 오태호는 김현식의 이전 작품인 5집 앨범이 나왔을 때, 많은 아쉬움이 들었다고 한다. 1988년 어느 공연장 대기실에서 자신이 흥얼거리던 음악을 유심히 듣던 김현식이 ‘이 곡, 내게 줄래?’라고 청했고, 오태호는 망설임없이 ‘네’라고 대답했다. 그가 떠난 이후 발표된 유작 앨범인 6집의 타이틀곡 ‘내 사랑 내 곁에’는 그렇게 잠시 묻혀있었다. 김현식은 이미 이 곡의 깊이와 발표 시기를 고민하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내 사랑 내 곁에’는 김현식과 하나가 된 명곡이 되었다. 앨범의 엔딩곡은 김현식의 3집에 수록되었던 ‘우리 이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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