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악마.jpg


서쪽은 어디인가

-Pet Shop Boys <Go West>

 



올해 <라이프 오브 파이>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거머쥔 대만 출신 리안 감독에 대한 중국 본토의 감정에 대해 중국인 친구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싫어하는 사람들이 꽤 있지. 정부도 그렇고 대부분의 중국인들도 그렇고 아직은 내부의 문제점을 인정하기 싫어하니까. 중국 내부에 대해 안 좋은 말 하는 건 일단 막고 싶어해.”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답변 뒤에 그 친구는 뜻밖의 말을 남겼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브로크백마운틴> 좋아하는 사람은 많아.”

어째서?”

중국 얘기가 아니잖아. 미국 애들 게이짓하는 얘기라고 좋아해.”

“……”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영화 독법.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런 창의적인(?) 해석과 맞닥뜨리는 것이 그다지 드문 일도 아니다.우리는 은연중에 나의 상식이 곧 다른 사람의 상식이고 나의 프레임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착각하곤 하지만, 세상의 이해관계는 종종 정말 충격적일 정도로 다양하다. 상반된 이미지의 상징물들을 결합해 신선한 재해석의 세계를 보여주는 펫샵보이즈의<Go West>뮤직비디오는 그런 복잡한 이해관계의 한복판에서 기발하고 다양한 독법을 난무하게 만들었던 비디오 중 하나이다.

<Go West>는 형식, 메시지, 상징 등 다방면에서 기발한 콜라주를 보여주는 비디오다. 이 비디오에 등장하는 시각적 요소들은 크게 미국의 상징소련의 상징이라는 양대 축으로 나뉘어 있다. 소련의 상징으로 붉은 색 별, 러시아 군대를 연상시키는 건장한 남성 부대, 레닌 부조상 등이 등장한다면미국의 상징으로는 자유의 여신상, 마천루가 가득한 도시 풍경, 바다 및 서핑족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상징들은 각자 별개로 나열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재해석하듯 얽혀 있다. 뉴욕을 연상시키는 마천루의 도시에는 붉은 별이 박혀 있고, 추운 나라 러시아 군대는 미국 캘리포니아 서핑족처럼 몸에 착 달라붙는 민소매 옷으로 섹시미(?!)를 드러낸다. 흑인 여성이 연기하는 자유의 여신은 붉은 옷을 입고 소울풀한 보컬을 뽐내며, 레닌의 부조상은 서쪽으로 가라는 노래의 후렴구에 맞춰 서쪽을 가리키는 것으로 연출된다. 이렇게 결합된 상징들은 디스코 팝의 원색적인 아이템과 어우러져, 실사와 3D 모델링의 결합으로 표현된다.

90년대에 만들어진 이 비디오의 3D 모델링은 기술적인 면에서 보면 너무 단조롭고 어색하기까지 하다. 그러나저질(?) 3D로 인해 티가 팍팍 나는 가상 세계속에서 서로 뒤섞여 버린 미국과 소련의 상징물은 노래의 메시지를 놀라운 수준으로 시각화한다. 이 비디오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전달한다. 이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세계는 일종의 평행우주다. 볼셰비키의 혁명 정서를 게이 디스코의 필터로 거르고, 미국식 자유에 붉은 옷을 덧입힘으로써, 현실 세계에서 더럽혀진 자유평등을 비디오 속의 가상 세계에서만큼은 본래의 이상적 지위에 되돌려 놓는다. 게이 유토피아에 대한 선망을 담은 노래 <Go West>는 본래 빌리지 피플이 불렀을 때는 순도 100%에 가까운 경쾌함을 자랑했지만, 펫샵보이즈는 이것을 좀 더 서글픈 노래로 바꾸었다. 뮤직비디오가 보여주는 가상 세계는 아기자기함과 동시에 서늘함을 안겨주고, 이는 펫샵보이즈의 음악과 훌륭한 시너지를 이룬다. 닐테넌트는 이 비디오를 만들게 된 배경에 대해 “MTV Russia가 개국할 때 행사 차 러시아에 갔다가 우연히 기획하게 된 것이라고 무심히 말했지만, 레닌의 부조상이 서쪽을 가리키는 장면을 두고 당신이 동방에 있다면 반대쪽으로 가 보고 싶은 생각이 당연히 들지 않겠나. 그런 의미다.”고 말함으로써 여러 상징물의 결합에 장난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암시했다.

그런데 그 상징들에 걸린 이해 관계가 어찌나 복잡했던지, 이 뮤직비디오에 대해서는 유독 서로 정반대의 해석이 난무한다. ‘사회주의 유토피아에 대한 꿈을 천명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디스코 복장으로 모스크바를 누비며 감히 레닌과 러시아 군대를 서방의 관점으로 모독했다고 분개하는 이도 있다. 같은 러시아인 중에서도 이것을 서방 세계와 같은 개방/자유를 허하라는 메시지로 보고 지지/반대를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서방으로 진격해 세계를 정복하라는 의미로 읽고 지지/반대하는 이들도 있다.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동유럽인들 중에서는이 노래가 (상대적으로 소련에 비해 서방 쪽에 있는) 자신들을 다시 지배하라는 뜻으로 보인다며꺼리는 경우도 있다.이 노래를 둘러싼 복잡한 해석의 충돌은 펫샵보이즈 본인들도 세계 각지에서 날아온 팬레터를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이다.

누군가의 눈에는 황당무계하게 보일 해석이라도, 그 당사자들에게는 그렇게 해석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늘 그렇듯 해석이라는 것은 대상에 대한 정보를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이라기보다는 해석하는 자의 세계관을 표출하는 것에 가깝다. <Go West> 비디오처럼여러 상징물이 얽힌 작품일 경우엔 더더욱 그렇다. 이 비디오에 대한 해석에는 개인의 역사관 및 경험,구 소련에 대한 가치 평가, 팝 문화, 게이, 디스코 문화에 대한 가치 평가에 이르기까지 해석하는 이의 여러 가치관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제 이 비디오를 볼 때면 최근 반동성애법을 발효한 러시아의 상황을 떠올리지 않기가 힘들다. 현재의 관점으로 과거의 작품을 해석하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왜곡의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상황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감상이라는 것도 존재하기 어렵다. 러시아는 스탈린 지배 하의 소련 시절부터 러시아 정교회 네트워크와 야합해 동성애자들을 탄압해 왔다.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 직후 레닌 치하에서 15년 간, 개방 정책을 폈던 옐친 정권 시절 잠깐을 제외하고는 동성애자들을 지속적으로 법적 탄압의 대상으로 삼았다. 현실 사회주의의 일당 독재 체제에 민족주의, 국가주의적 단결 의식이 결합한 결과는 무시무시했다. 러시아인들은 스탈린에 이어 푸틴이 그대로 이용하고 있는 교회 네트워크의 권력에도 굉장한 충성심을 보여주고 있다. 웃기는 것은 러시아인들이 공산 혁명을 겪은 나라의 인민들답게 신앙심은 별로 깊지도 않으면서 교회에 대한 충성도만 강하다는 점이다.*러시아의 LGBT 인권 역사에서 특이한 점은 앞으로 가는 듯하다가 다시 후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것, 그리고 믿지도 않는 종교의 현실적 권력을 긍정하며 동성애 압박을 용인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혁명부터 개방까지, 초강대국의 지위부터 끔찍한 가난까지 안 겪어본 것이 없는 국가여서일까. 세상에 대한 어떤 환상도 남아 있지 않은 그들은 종교와 이념을 불관용/증오에 대한 포장 도구로 쓰는 것에 아무 거리낌이 없는 나머지 이를 숨길 생각조차 없는 것 같다. 보통 LGBT 인권의 주적으로 지목되는 것은 종교지만, 종교 자체가 인간이 창조한 문화의 일부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결국 문제는 인간으로 되돌아온다. 러시아의 상황은 이를 잘 보여준다.

<Go West> 비디오에서 러시아 섹시 군대 용사들은 자유의 여신상이 양쪽으로 세워진 긴 계단을 힘차게 오른다. 펫샵보이즈가 얼마 전 사운드트랙을 새로 만들기도 했던 <전함 포템킨>의 혁명 장면을 LGBT 버전으로 재창조한 듯한 이 계단 장면의 배경은 구름 가득한 하늘나라다. 커밍아웃한 게이가 폭행을 당해 사망했다는 러시아의 요즘 뉴스를 보고 있으면, 예전에는 그렇게 크게 눈에 띄지 않았던 이 천국의 계단설정이 유독 심각하게 다가온다.펫샵보이즈는평화로운 인생이 기다리는서쪽으로 함께 손을 잡고 가자고 말한다. 그런데 어디가 서쪽일까.전근대적 이론의 신봉자가 아닌 한 우리는 이것이 특정 지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구는 둥그니까.

 

-by eerie

http://patricidaljubilee.egloos.com/

 

*참고문헌: <러시아는 왜 동성애를 혐오하나?-디 애틀랜틱>, 머니투데이, http://news.mt.co.kr/mtview.php?no=2013061317284366654


  1. [Floyd의 음악이야기] [소식] 2014년 상반기 내한 공연 아티스트 모음

  2. [눈시칼럼]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낳은 도시전설

  3. [한귀에반한] 5화: 로맨틱펀치의 오해와 응답하라 1994의 이해 (서태지와 아이들 - 너에게)

  4. [대중문화의 들] 응답하라 1994, 그리고 시대를 앞섰던 서태지와 아이들을 추억하며

  5. [눈시칼럼] '기황후'

  6. [까만자전거] 라라밴드

  7. [Floyd의 음악이야기] 영원히 함께하는 시대의 목소리, 김현식

  8. [한 귀에 반한] 4화: 이적 - 서쪽 숲

  9. [눈시칼럼] 명성황후 vs 민비 호칭편

  10. [대중문화의 들] 조용필 최고의 명반, 7집 '여행을 떠나요, 미지의 세계'에 관하여

  11. [한 귀에 반한] 3화: 장미여관, <하도 오래 되면>

  12. [Floyd의 음악이야기] [Review] 박성하 2'st 싱글

  13. [까만자전거] 코머스(Comus)의 기괴한 역작 음반, <First Utterance>

  14. [eerie의 악마의 로큰롤] 포스트모던 마녀사냥 - CocoRosie와 Lupe Fiasco

  15. [까만자전거] 세시봉과 한글날 그리고 가나다라

  16. [눈시칼럼] 광해군

  17. [Floyd의 음악이야기] 한국 락페스티벌 문화의 희망과 절망, 1999 트라이포트 락페스티벌

  18. [한 귀에 반한] 2화: 패닉, <추방>

  19. [까만 자전거] 아침 이슬은 왜 금지곡이 되었나?

  20. [EERIE의 악마의 로큰롤] 서쪽은 어디인가 - Pet Shop Boys의 <Go West>

Board Pagination Prev 1 ... 2 3 4 5 6 ... 7 Next
/ 7

로그인 정보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