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만화를 보는 소년 - 사랑의 천사 웨딩 피치

by 호솜 posted May 2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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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법 소녀 물은 요새 유행하는 히어로 물이랑 흡사한데 소녀들이 주인공인 장르다. 남들이 로봇 물 볼 때 혼자 마법소녀 물을 보던 나의 은밀한 취미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캐치 유~ 캐치 유~ 캐치 미~ 캐치 미~” 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카드캡터 체리 OST는 지금도 내 아침 알람과 벨소리인데, 이 노래를 들으면서 하루를 시작하면 마음이 되게 평화로워진다. 하지만 남자가 마법소녀 물을 보는 건 동성들 사이에서 꽤나 터부시되는 취미인지 아직도 친구들과 밤새 술 먹고 널브러져 자다가 내 알람이 울리면 이것들은 아주 기겁을 한다.

ㅡ니가 그래서 연애를 못하는 거야 *신아!
ㅡ아 형! 형 취미 다 존중은 하겠는데 제발 지하철에선 벨소리 무음으로 해요. 스물여덟 먹고 체리가 뭐야 체리가! 내가 쪽 팔려 죽겠어.”

 스물여덟 먹고 내면에 풋풋한 순수함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데…… 아무튼 오늘도 천사소녀 네티에 이어 순수함을 담은 마법소녀 물을 리뷰 할꺼야!

 90년대 중, 후반. H.O.T.와 젝스키스, S.E.S와 핑클 팬들이 같은 하늘 아래 서로 양립할 수 없었듯 만화에도 숙명의 라이벌 구도가 구현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세일러문과 웨딩 피치.

 당시 열 살 소년이었던 내게 웨딩 피치와 세일러문의 선택은 짜장면과 짬뽕의 선택만큼이나 상당한 고민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웨딩 드레스냐! 교복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결국 고민 끝에 소년은 웨딩 피치를 선택하였다. 선택 이유가 어린 나이에도 뭔가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웨딩 피치네 애들이 왠지 더 예뻐(야해)보였기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알게 된건데 이 작품이 일본에서 세일러문의 열풍에 편승한 아류작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세일러문은 한번 변신하는데 얘넨 웨딩드레스-전투복의 2단변신을 하고 주인공들 컨셉 조차도 “세일러 문보다 더 긴 다리! 더 짧은 치마!”라는 컨셉이 녹아 있었다. 그래서 내가 (교복이 들어간) 세일러문보다는 웨딩 피치를 더 좋아했구나!

 웨딩 피치의 원제는 ‘애천사전설(愛天使??) 웨딩 피치’인데 애천사는 번역하자면 사랑의 천사라는 뜻이 되겠다. 1996년도 만화전문 케이블 채널 투니버스가 개국하면서 국내 첫 방영을 했다. 케이블이야 그 당시엔 보급이 안 되었으니까 사실상 동년인 1996년 MBC에서 하던 ‘요술천사 웨딩피치’가 대중화에 더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겠다.

 사랑의 천사들과 그의 연인들을 중심으로 중학교 내에서 벌어지는 러브 스토리 그리고 사랑을 방해하는 악마와의 사투가 주가 되는 내용인데, 천사계의 여주인공 ‘피치’와 악마계의 ‘케빈’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스토리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스토리를 차용했다는 점이 돋보인다. 피치는 급우 케빈과 티격태격 다투는 사이지만 내심 서로를 좋아하다가 나중에는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서로가 적대 진영 소속이라는 걸 알고 시련을 겪는다. 하지만 이런 류의 시나리오가 그렇듯 어려움을 극복하고 남친도 생기고 세상도 구하며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여기서 끝나면 딱 좋은데! 이 만화영화도 알고 보면 시청자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이 작품의 최종 보스이자 솔로 시청자를 풍자해서 만든 듯한 캐릭터, ‘레인 데빌라’다. 하지만 사실 데빌라도 고길동이나 짱구 엄마처럼 나이 먹고 다시 보면 불쌍한 캐릭터. 이 캐릭터를 통해 우리는 피치가 솔로 시청자들을 모독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선량한 악마 소녀였던 ‘레인 데빌라’는 우연히 흘러들어간 천사계에서 잘생긴 남자 천사를 먼 발치에서 보고 사랑에 빠져 버리게 된다. 하지만 용기내서 대시하려는 순간 갑자기 나타난 여자 천사가 남자 천사랑 데이트를 하는 걸 보고선 질투심에 악의 오오라를 내뿜게 되고 거기에 반응한 ‘사랑의 웨이브‘에 맞아서 천사계에서 쫓겨나고 만다. 실연의 상처를 겪고 “사랑 따윈 없어져야 돼!” 라고 흑화한 모태 솔로 레인 데빌라는 온갖 짠내나는 음모를 꾸미며 세상의 모든 커플들을 아작 낼 계획을 짠다. 여기까지는 그저 슬픈 과거를 가진 전형적인 악당이자 동정의 여지가 별로 없는데 마지막 화를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번번이 피치 일당들에게 계획을 저지당한 레인 데빌라는 마지막 화에 직접 강림하여 피치 일당을 공격 한다. 동료들이 쓰러지고 마지막에 남은 피치 커플이 맞서 싸우지만 역시 역부족이다. 근데 두들겨 패서 둘을 떼어 놓았지만 온갖 물리적 수단을 써도 이 커플은 기어서라도 몇 번이고 징그러울 정도로 서로가 서로에게 엉겨 붙는다.

ㅡ 피치이이잇!
ㅡ 케에에에에에비이이이이이인!

 시청자로서 마지막 전투씬을 보면서 “싸우는데 왜 애정질이야!”라고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하는데 최종 보스의 심정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세상 구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들끼리 염장질하는 거 같은데. 시청자 입장에서 뭔가 화가 나면서도 부럽다는 마음이 슬몃 들기 시작할 때쯤 그로기 상태의 피치가 모태솔로를 대표하는 레인 데빌라를 향해 일갈했던(악에 받쳐 비꼬는 거 같지만) 마지막 대사는 우리 솔로 시청자들의 심금마저도 울린다!

ㅡ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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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치의 일갈에 레인 데빌라의 표정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다. 전투를 빙자한 궁극에 달한 염장질에 이어 비아냥을 보고 있는 우리 솔로 시청자도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거다 분명히. 우리는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레인 데빌라의 처지를 동정하게 되며 솔로를 대변하는 레인 데빌라가 이기길 바라고 있을 지도 모른다.

 저 커플은 왜 전투 중에 염장질을 하는 걸까. 그리고 천사면 천사답게 좋게 좋게 해결해도 되잖아. 사랑의 멋짐을 몰라서 불쌍해 보이면 소개팅이라도 시켜주던가. 시켜주지도 않을 거면서. 사랑의 천사 웨딩 피치는 무슨, 웨딩 비치가 따로 없다!

 그러고보면 우리들 주변에도 피치 커플 같은 애들, 꼭 있다. 문득 예전에 학교에서 팀 프로젝트를 했던 게 생각이 난다. 어쩌다 팀에 새내기 커플이 꼈었는데 이것들은 팀플을 하긴 하는데 주변 팀원들 시선은 딱히 신경 안 쓰고 서로 온갖 애교를 부리니...... 기억을 살려서 얘기하자면 대충 이런 식이다.

ㅡ 자기는 이거 맡아
ㅡ 그 부분 어렵지 않아? 내가 맡을게
ㅡ 자기가 힘든 거 보단 내가 하는 게 나아
ㅡ 이잉~ 하트뿅뿅(이걸 직접 입으로 말했다!)
ㅡ 아잉~(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든다!)

얘네가 일은 잘하고 또 초면이라 뭐라 말은 못 했지만 옆에서 보고 있자니 눈꼴 시려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짜증이 팍 났는데 근데 그러면서도 솔직히 조금은 부럽기도 하고. 문득 혓바닥 뿌리까지 씁쓸함이 한가득 느껴지는게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나는 불쌍하구나 싶기도 하다.
아아!! 나도 사랑의 멋짐을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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