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oyd의 음악이야기] 추모기사_유재하 음악의 의의

by 냉동보관 posted Nov 0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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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하


한국 대중음악의 중요한 맥을 짚어낸 아티스트


11월 1일은 한국 대중음악계에 있어서 아픔이 큰 날입니다. 오늘은 27주기를 맞이한 故유재하와 24주기를 맞이한 故 김현식의 기일입니다. 먼저 떠나신 유재하의 삶에 흘렀던 고인의 음악을 소개합니다.?


단 한 장의 앨범을 통해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고, 아직도 웬만한 이들은 범접하지 못할 영향력을 지닌 가수이자, 작곡가, 뮤지션 유재하. 그가 떠난 시간이 차가운 기억의 편린이라면, 그가 남긴 음악과 그를 기리는 많은 후배들의 온정은 점점 더 따뜻하게 번지고 있는 진한 흔적과 실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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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하를 기억하는 대중과 그를?여전히 기록하는 대한민국 대중음악계


한국 대중음악은 전후세대를 이어서 1960~70년대 ‘미8군 캠프’ 출신과 ‘신중현 사단’을 중심으로 계보를 이어 나왔다. 이후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 등을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국내 파퓰러 음악은 가창 위주의 가수를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것이 장점이자, 단점으로 남아있다. 1989년부터 현재까지 꾸준하게 유지되며 한국 대중가요의 단점을 폭넓게 보완하면서 300여 명에 이르는 가수와 뮤지션을 배출한 가요제가 있다. 단 한 장의 앨범을 통해 한국 대중가요사에 꾸준하게 기억되고 기록되고 있는 유재하의 음악을 기리는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가 바로 그것이다. 춤과 비트에 주요한 음악, 대형 투자에 의해 조직적으로 제작되는 음악이 아닌 순수음악에 더 가깝고, 해외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실력과 감성을 지닌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 출신의 가수와 뮤지션들은 현재에도 활발하게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보배같은 존재들이다. 이들은 그 어느 특정 가요대회나, 페스티발 출신들과 다르게 자신들만의 올곧은 음악적 지향점을 지닌 채 유려하게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빛나고 있다. 금년으로 24회째를 맞이한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는 솔로든 팀이든 학생(대학원생 포함)이 한 명 이상 포함되어야 출전이 가능하고, 참가자가 창작곡을 만들 줄 알아야 하며 편곡까지 해내야 한다. 유재하의 음악이 품고 있는 학구적이고 현학적인 면모를 신인 뮤지션들에게서 다시 한 번 찾고자 하는 깊은 의도가 담겨져 있다. 때문에 춤과 무대 매너를 강조하는 여타 오디션과 달리 음악에 보다 더 집중되고 진지한 감성을 지닌 참가자의 유형으로 인해 소중한 결과물들을 꾸준하게 내놓고 있다.


지난 1987년 스물다섯의 나이로 요절한 고(故) 유재하를 기려 1989년 처음 열린 이 대회는 그동안 조규찬, 유희열, 김연우, 심현보, 이한철 등 걸출한 뮤지션들을 대거 배출하며 한국 대중음악계의 등용문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올해 11월에 그의 모교인 한양대학교에서 다시 한 번 열린 이번 대회는 후원 기업이 확보되지 않아서 2005년 한 차례 중지된 사례처럼, 대회 자체가 다시 한 번 무산될 위기에 처했었다. 그러나 이 대회 출신 뮤지션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심사, 홍보, 포스터 디자인, 방송 등 대회와 관련된 모든 부분을 도맡으면서 진행을 이룰 수 있었다. 2006년 제 17회 대회 출신인 권순관은 “이번 대회가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에 많은 후배, 선배들의 문의가 쏟아졌다. 결국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지원하고 일반인들의 관심도 높아졌다”고 전한다. 높아진 대중의 관심은 보통 300여 팀의 지원자가 몰리던 과거와 달리 역대 최다에 해당하는 482팀의 참가 신청으로 이어졌고, 이 날 공연의 피날레는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 출신의 동문 40여 명이 한 무대에 올라서 유재하의 명곡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합창하면서 마무리되었다. 대한민국 대중가요사는 물론 그 이상의 영역에서도 ‘유재하’라는 가수가 지닌 의미와 영향력은 여전히 깊고 넓다. 그가 걸어온 길과 음악, 그리고 그의 음악이 갖는 의의에 대해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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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하 음악의 의의


유재하는 가수이자, 작곡가, 뮤지션이다. 그가 작업한 곡을 받아 노래를 불렀던 가수는 조용필과 김현식, 이문세 등 한국 대중가요사의 명인들이었다. 그리고 그가 세션 뮤지션으로 참여했던 그룹과 가수는 한국 음악사에 굵직한 선을 그은 최고의 집단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재하가 남긴 유산이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적인 측면에서 특별한 기록을 남겼던 것은 아니다. 물론 데뷔 앨범이 150만 장 이상 판매가 되었지만, 유재하는 음악인으로서 가장 평범하고 온전한 과정을 이어 나왔다는 표현이 맞겠다. 그러나 그가 남긴 단 한 장의 앨범에 수록된 9곡의 음악은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수준을 몇 단계 높였으며, 록과 블루스, 그리고 재즈와 클래식의 교감이 섞인 새로운 영역의 가능성을 보여줬고 성공시킨 의의를 갖는다. 한편 유재하의 음악은 그가 살아 있었을 때의 현실과 사후에 이어졌던 평가가 너무나 다르다. 유재하에 대한 평가는 요절한 대개의 뮤지션과 아티스트가 그러하듯이 사후에 즈음해서 집중적으로 시작되었다.?


때문에 유재하의 음악은 한국 대중음악의 성장과 과정에 있어서 특별한 존재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존재는 동아기획과 하나기획을 중심으로 생성되고 확장되던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시작점에서 발견된다. 조용필과 김현식이 각각 이끌던 위대한 탄생과 봄여름가을겨울에서 유재하는 뮤지션으로서의 제 역할을 다하지는 못했다. 좀 더 정확히 그는 자신이 지향하는 음악적 정점과 그들이 완성하고자 하는 음악의 맥에 차이점을 느끼고 자신만의 돌파구를 찾아 나섰다. 유재하는 이미 성공적인 단계를 거치고 있던 한국식 발라드의 문법과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는 기존 가요와는 상반되는 작법을 구사했고, 사운드적으로도 시도되지 않았던 방식으로 자신의 솔로 앨범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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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하의 삶과 데뷔


‘가요계의 모짜르트’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유재하는 모짜르트와 베토벤을 중심으로 클래식을 좋아하고 일생동안 음악을 향한 열정이 남달랐다. 그는 1962년 6월 6일 3남 3녀 중 다섯째로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던 정이 많고 온화한 성품이었고, 부모에게 극진했던 효자였다. 1969년 서울 은석초등학교를 입학했고, 1975년 삼선중학교, 1978년 대일고를 졸업한 이후 1981년 한양대 음대 작곡과에 진학하는 등 평범한 성장기를 지나쳤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이 월등했던 유재하는 음대 재학시절 순수 음악을 전공하면서도 대중들을 위한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여러 악기에 능통했던 그는 작곡과 작사, 편곡에도 능숙했던 만능 뮤지션이자, 평범한 음악 학도였다. 대학 재학시절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디스트로 가입을 하면서 대중가요계에 첫발을 내딛였다. 그는 이 당시부터 자신만의 음반을 위해 작사와 작곡을 꾸준히 진행했다. 이 당시 조용필은 그가 전한 ‘사랑하기 때문에’를 자신의 7집 앨범에 수록했지만, ‘미지의 세계’와 ‘여행을 떠나요’ 등에 밀려 큰 히트를 기록하지는 못했다. 이후 김현식의 음악적 전환점이 된 3집 앨범에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그룹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김현식의 3집 앨범 작업이 진행되기 직전 그는 “형에게 맞아 죽어도, 같이 활동할 수 없다.”며 밴드를 떠나고 만다. 음악적 지향점이 달랐던 것뿐 김현식과는 호형호제하던 사이였던 유재하는 김현식에게 자신이 평소 아끼던 ‘가리워진 길’과 ‘그대 내 품에’ 등 2곡을 주었고, 이 곡은 김현식의 3집과 4집 앨범에 각각 수록되어 준히트를 기록했다.


당시 그는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당대를 주름잡던 조동진과 김민기, 이문세, 엄인호, 김광민, 한영애 등과도 깊은 교류를 가졌으며, 그들과의 만남 속에서 한층 유연하게 자신의 솔로 앨범을 준비할 수 있었다. 이후 학교 선배이자 음악적으로 교감을 이루던 이원재와 동아기획에서 음반 발매를 논하게 되지만, 이원재의 음반에 대해서만 취입이 결정되면서 유재하는 한 차례 위기를 맞게 된다. 결국 유재하는 음반사를 서울음반으로 결정해서 2달여간의 녹음 끝에 9곡이 수록된 자신의 데뷔 앨범이자 유작을 1987년 발매하게 된다.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던 그의 음반이 발매 3개월이 지난 11월 1일 새벽 3시 용산구 한남동 강변북로 부근에서 술에 취한 친구가 몰던 승용차를 함께 타고 가다가, 운정중인 차가 중앙선을 침범해서 마주오던 택시와 정면충돌하면서 그는 스물 여섯의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유재하의 유작 [사랑하기 때문에]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 있어서 유작으로 기록된 앨범이 생전을 넘어선 사례는 적지 않다. 4월과 5월 출신으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김정호의 사후가 그랬고, 김현식의 유작 앨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유재하가 남긴 유작은 김정호와 김현식과는 다른 내용을 갖는다. 두 가수는 이미 정점을 어느 정도 찍었고, 생전에 나름의 음악적 평가와 대중의 사랑까지 얻은 이후의 유작이었지만, 유재하의 음반은 제대로 평가를 받기 이전 사망했고, 그 이후 이슈의 확대에 의해 제대로 된 평가로 이어졌다. 그가 남긴 데뷔 앨범의 자켓 디자인은 그의 1집은 3가지 종류의 재킷이 존재한다. 1987년 4월에 발매된 초반은 대표 곡 ‘사랑하기 때문에’가 담배연기로 디자인된 독특한 이미지의 재킷이다. 하지만 4개월 후 유재하의 사진으로 평범하게 디자인된 LP와 CD가 동시에 재발매되었다. 수록곡 대부분은 독특한 변조의 코드진행으로 그의 음악을 처음 접한 이들은 생소한 느낌을 전달받았다. 클래식 음악의 화성학과 클래식을 전공한 유재하는 기존의 대중가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노래로 완성되었다. 전체 수록곡은 한 편의 소설을 연상시킨다. 만남 이후에 느낀 구애와 사랑의 과정과 완성된 마음을 담아냈다. 실제 교제를 하던 상대를 위한 컨셉을 담은 유재하의 앨범은 그녀와의 첫 만남부터 몇 번의 헤어짐, 재회에 이르기까지의 연애일기와 다름 아니다. ‘그대 내 품에’는 사랑을 구애하던 시절의 간절하고 애가 타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으며, ‘우리들의 사랑’은 사랑이 받아들여진 이후 느꼈던 가슴 벅찬 기쁨을 담고 있다. 그리고 ‘지난날’은 이별에 의한 서글픔을 표현했고, 그의 대표곡인 ‘사랑하기 때문에’는 짧은 이별 후 자신에게 돌아온 이를 위한 온 마음을 담은 사랑의 송가이다. 유재하의 유작 앨범인 [사랑하기 때문에]는 경향신문에서 2007년에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목록"에서 2위를 차지하는 등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최고의 명작으로 추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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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하 음악 경연대회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는 유재하와 그의 음악을 기억하고, 실력있는 신인 대중 음악가를 발굴하기 위해 매년 열리고 있는 대한민국의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음악 경연대회이다. 이 대회는 유족들이 고인을 추모하고 고인의 음악적 한을 기리는 가운데 실력있는 신인을 선발하기 위해 앨범 판매 수익을 중심으로 1988년 유재하의 아버지(故유일청)가 설립한 음악 장학회이다. 대회가 열릴 때마다 입상자 전원에게 상금이 주어지는데, 장학금 총액은 1500만원 정도이다. 1989년 1회부터 2004년 16회까지 열렸으며, 2005년에는 재정적인 문제로 중단되었다. 장학금으로 지급할 돈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이후 동료 가수들이 추모앨범을 만들어 수익금을 기탁하기도 했지만, 결국 저금리의 장기적 흐름으로 재정적 어려움 끝에 기약없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2006년 커뮤니티 사이트 싸이월드의 후원으로 17회가 어렵게 재개되었다. 2003년 한양대학교 31대 총학생회에 의해서 15회 음악 경연 대회부터는 그의 모교인 한양대학교로 영구 유치되어 현재까지 모교의 백남음악관에서 행사가 매년 열리고 있다. 이 경연 대회는 대한민국 대중 음악계를 이끌어가는 싱어 송 라이터들의 등용문으로도 유명하다. 대표적인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 출신 가수로는 조규찬, 일기예보, 자화상, 재주소년, 고찬용, 유희열, 강현민, 나원주, 이한철, 스윗소로우 등이 있다.




유재하에게 헌정된 음악


생전에 절친했던 유재하의 친구로는 전태관과 김종진, 장기호, 박성식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김현식과 함께 했던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을 거쳐 간 멤버들이다. 김종진과 전태관은 이후 자신들의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을 조직했고, 장기호와 박성식은 빛과 소금으로 성공적인 음악 인생을 이어 나왔다. 두 그룹과의 유대감은 유재하 음악에 어느 정도 기폭제가 되었다. 유재하의 노래는 1985년 조용필과 김현식을 필두로 이문세, 한영애, 봄여름가을겨울, 박진영, DJ DOC, 조규찬, 왁스, 이기찬, 정수라, 나얼 등 수많은 가수들이 그에게 직접 곡을 받아서 부르거나 리메이크해서 노래를 불렀다. 특히 1997년에는 후배 음악가들의 헌정 앨범인 [다시 돌아온 그댈 위해]를 발표했다. 에픽하이는 2집 앨범에서 ‘11월 1일’이란 곡으로 김현식과 유재하를 추모했다.





출처 ?floyd20.egloos.com/3010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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