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소품집] 밑줄 친 책

by 호솜 posted Jul 0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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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30분 늦게 도착했음에도 또 다른 30분을 뜨게 만드는 단골지각생 친구 녀석. 나는 왜 이 녀석의 친구이며, 이 녀석은 왜 나의 친구인가를 생각하다 내 업보요- 그저 종로거리를 걷는다. 발이 닿는 곳으로 가고 가다 발견한 중고서점 하나. 마치 소원을 들어줄 것 같은 간판에 입구로 발을 디뎠다. 빌 만한 소원을 갖고 사는 지도 모르겠지만.

서점, 의외로 사람이 많다. 모두 나처럼 지각 쟁이 친구라도 한 명씩 둔 걸까. 아니면 시간을 내서 책을 찾을 만큼 여유로운 걸까. 서점 방문이란 게 여유가 전제되어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참 여유로워 보였다. 그래서 순간 여유로운 삶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닌지 시샘 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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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한 켠을 차지한 채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사람들. 움직임 없는 끄덕임만이 가득하다. 이상한 나라를 방문한 듯 나만 어색하게 동화되지 않는다. 그래서 무작정 책 한 권을 짚어들었다.

몇 년 전만해도 서점에 올라치면 ‘20대야 아파라, 더 아파야 하느니라, 여자들이여 현명하게 사랑하려무나.’ 등 각 종 각성제들을 염탐하곤 했는데, 이제는 암묵적 약속인 마냥 소설책이 즐비한 곳으로 향한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만이라도 현실을 잊고 싶어서랄까. 딱히 괴로운 현실이랄 것도 없는데도 고개를 들이미는 도피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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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앞뒤를 살피기를 두어 차례. 그러다 스윽- 책장을 넘겨보는데, 어라? 까만 밑줄이 군 데 군 데 보였다. 이런 무지몽매한 사람을 보았나. 버젓이 하얀 종이 사이로 3.8선이 그어져있다. 중고서점에 내놓으면서 밑줄 친 것은 무슨 베짱이며, 여기 직원들은 이런 책을 그냥 받았나? 엄연히 따지면 낙서이다. 애초에 작가의 의도대로 인쇄된 검정 잉크가 아니니까.

그런데 요상하다. 그저 한 번 넘겨보고 마려던 내 손을 밑 줄 쳐진 구절 하나하나가 붙잡는다. 읽게 된다. 읽고 있다. 애석한 마음에서였을까, 애틋한 마음에서였을까. 이 사람은 왜 이 곳에 밑줄을 친 거지? 함부로 비집고 들어오는 밑줄이 불친절함에서 호기심으로 바뀌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모른 채 그 사람의 감성을 찾아나가고 있었다. 30분 더하기 30분 늦은 친구의 전화는 무시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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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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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들어와 혼자의 시간을 보내다 가는 곳이었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책이 들려주는 소곤소곤 이야기를 소재로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과의 밀회를 가지고 있었다. 이름 석 자 모르는 이와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고 있었고, 점차 그 사람의 온기도 담겨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문득 나의 외로움을 마주할 때가 종종 있다. 지난 주 버스에서 스친 옆 사람의 어깨처럼 당혹스러움이 기쁨, 외로움으로 변할 때가 있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것에서 기뻐하는 것이 내색하지 않던 기특한 나의 외로움을 마주하는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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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을 나섰다. 나서기 전엔 고민을 했다. 이 책을 살까, 말까. 나는 밑줄 친 책을 사지 않았다. 모든 작가가 심혈을 기울인 책 중에서 가치 없는 것은 없다. 그런데도 안 샀다는 건 내 흥미를 끌지 못해서? 평소 책을 구매하는 요인이 그것이라면 외려 사는 게 맞았다. 그런데, 흥미가 끌어당기는 힘보다도 그 책이 그곳에 있어야하는 이유가 더 컸다.

?혹시 31분 지각하는 친구 탓에, 행인이 빽빽한 거리를 비집고 누군가가 이곳을 오게 될지도 모르니까. 2가 이 아이를 마주했으면 했다. 나는 이 정도의 감사함으로 재충전이 충분했다. 이럴 때보면 나, 참 특이하게 살고 싶어 발악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정석을 피해 갓길로 가려고하는 것, 이것도 관심종자의 한 행동이겠지. 그래도 산물은 있었다. 밑줄 친 책 대신 밑줄 없는 책 한 권을 구매했다.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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