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추억속의 산재처리 -3-

by JYC posted Nov 0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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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속의 산재처리

- 3 -




선재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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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는 그 느티나무 아래 벌써 와서 앉아있었다. 날씨가 꽤나 더웠음에도 선재는 두꺼운 양복을 입은 차림이었다. 양복에 넥타이까지 산재 처리 따위는 포기하고 새로운 회사에 취직하려 하는 신입사원처럼 보였다. 그는 내심 안심했다. 선재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선재 옆에 바나나우유를 하나 내려놓고 앉았다. 바나나 우유 밑의 시멘트가 진한 색으로 물들었다. 일요일의 학교는 고요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하나도 안 변했더라.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간판을 메고 있는 걸 한눈에 알아봤어.”

선재는 대꾸도 없이 한참이나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날 밤 기억나? 삼겹살이랑 같이 야영 했던 날. 내가 너한테 안겨서 울었잖아. 성추행을 했다느니 그러면서

응 그랬지, 내용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그러니까 말이야. 잘 살았어 그리고 나서도 존나게 잘 살았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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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는 담담하게 그간의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대학에 입학해서 선재는 봉사활동 동아리에 들어갔다.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으로 봉사활동을 갔다. 그 고아원은 소꿉친구가 이사를 가버렸다던 동네 근처였다. 소꿉친구는 그 사건 이후로 선재에게 인사도 없이 이사를 가버렸다. 선재는 몇 번이나 그 동네를 찾아갔으나 소꿉친구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선재는 거기서 냉장고를 닦고 말리는 일을 맡았다. 냉장고를 힘겹게 마당으로 꺼내고 닦으려는데 걸레를 빨아오는 여자는 그 소꿉친구였다. 둘은 여름날 수녀원 마당에 있는 냉장고 앞에서 다시 만났다. 둘은 그 냉장고의 물기를 제거하며 지나온 삶을 이야기했다. 우연이 둘을 묶어주었다. 소꿉친구는 그해 겨울 입대 한 선재를 기다려 주었다. 그 소꿉친구는 일찌감치 작은 아버지 회사에 취직했다. 군대에 다녀와 대학교를 다니는 선재를 뒷바라지 해주었다. 선재는 새로 생긴 광고회사에 카피라이터로 취직했다. 둘은 곧 결혼 할 예정이었다. 중학교 때 첫사랑과 결혼한다는 아주 낭만적인 러브스토리의 마무리가 될 예정이었다.


근데, 문제는 말이야. 거기서 부터였어. 취직만 하면 다 잘 될 줄 알았어. 일은 별로 힘들지 않았어. 근데 사장이 문제였어. 우리 회사 사장이.”


?선재의 회사 사장은 테니스를 좋아했다. 새로 입사한 신입사원들에게 테니스라켓을 선물해 주었다. 회사 내에 테니스 동아리 모임을 열어 토요일마다 신입사원들을 불러냈다. 동아리 모임 장소인 테니스장은 사장의 별장이 있는 남양주에 있었다. 선재뿐만 아니라 각 부서의 신입사원들은 대표로 한 명씩 사장의 파트너가 되어야 했다. 선재는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없는 운동신경을 발휘하여 악착같이 사장의 테니스 파트너가 되었다. 항상 그 테니스 동아리의 마지막은 근처 개고기집에 가서 개고기 수육과 탕을 먹고, 술을 새벽까지 마셨다.

?선재는 지친 몸을 이끌고 일요일에 애인을 만나려고 하였으나 파도처럼 덮치는 잠이 애인을 만나고 싶다는 욕구조차 덮쳐버렸다. 테니스는 만만한 운동이 아니었다. 곡절 끝에 애인을 만나도 성생활조차 자연스레 포기하게 되었다. 그의 소꿉친구는 지쳐갔다. 일을 그만두고 싶어 IMF라는 괴물은 그를 그 회사에 더욱 집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선재는 거지로 무시당하는 것 보다 미치광이가 낫다는 생각을 하며 악착같이 버텨내고 있었다. 선재가 그렇게까지 회사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어려워진 집안 형편 때문이었다. 당장 융자 상환계획이 정해진 상태에서 선재라는 톱니바퀴가 빠진다면 그의 가정도 무너져버릴게 뻔했다. 선재는 결혼도 해야 했다. 결혼이라는 것은 가장이 가정을 부양하는 제도이다. 선재는 가장의 자리를 아내에게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월급. 그것은 선재가 속해있는 가정과 선재가 꾸릴 가정을 세우는 기둥이었다.


?선재는 동기들 보다 한 분기 가량 빠르게 사원딱지를 떼고 대리가 되었다. 월급도 다른 동기들에 비해 월 10만원을 더 받게 되었다. 선재는 이 기쁜 소식을 애인에게 전했다. 그러나 선재의 애인은 선재에게 이별을 고했다. 선을 봤다고 했다. 그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 자신은 사랑을 소유라고 생각한다고, 너는 가족만 소유하고 싶어 했다고, 가족과 돈에 밀려서 항상 뒷전인 자신이 너무나 비참했다고 말했다. 선재는 여자 친구를 붙잡을 염치가 없었다. 선재는 부끄러웠다. 평생을 너만 바라보고 살았다고 너밖에 없다고 애원하고 싶었으나 그렇기엔 소꿉친구를 소홀히 한 시간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는 평생을 바친 사랑 앞에서도 무기력했다. 중요한 것들, 중요하지 않은 것들의 구분이 사라졌다.

?그날부터 선재는 가라앉았다. 자꾸 회사에 지각을 했다. 조용하게 열심히 일하는 사원인 선재는 어디론가 영원히 가라앉아 버렸다. 선재는 길을 걷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숨을 쉬다가도 소꿉친구를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선재는 자신이 그때는 정말 미치광이가 되었다고 말했다. 선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에서 해고당했다. 고용계약서에 명시된 근태의 불량이 그 이유였다. 선재는 퇴직금만 몇 푼 손에 쥔 채 그렇게 선선히 퇴직했다. 선재는 집안의 골칫덩이가 되었다. 선재는 그때부터 집옥 생활을 했다. 집옥 생활을 시작하면서 선재는 잠에 들지 못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잠만 자게 되었다. 선재는 집이 감옥이라는 착각에 빠졌다. 화장실도 방안에서 해결하며 어머니가 놓아주는 밥만 먹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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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의 집옥 생활이 길어졌다. 집에 갇혀서 집밖을 그리워했다. 내리는 비가 내리면 비를 맞으며 울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울어도 가라앉아버린 선재의 울음소리를 듣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선재는 20세기를 지나보냈다. 20001121세기를 살게 된 선재는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달라지기 위해서는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재는 자신이 망가진 것이 회사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회사는 선재를 책임져 주지 않았다. 산업재해가 어떤 것인지 자신의 사례가 산업재해에 해당하는지 몰랐다. 선재는 다만 인정받고 싶었다. 사장을 찾아갔지만, 선재의 대리 자리를 차지한 김대리에 의해 쫓겨났다. 선재는 다시 찾아가고 쫓겨나는 생활을 반복하였다. 선재는 그런 복잡한 과정을 겪으면서 복수를 생각했다. 선재는 그 생활을 반복하는 동안에도 소꿉친구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선재는 자신을 치료하기 위해서 마지막 수단으로 매일매일 그 회사 앞에 찾아가서 출근하는 사장에게 죄책감을 상기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그것은 아마 어긋난 열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선재가 선택한 방법은 서있는 것이었다. 선재가 한 것이 최초의 1인 시위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선재의 한숨 같은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어느덧 오후도 몇 시간이나 지나있었다. 선재는 바나나우유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의 와이셔츠에 노란 물이 몇 방울 떨어졌다. 곧 검은 색으로 물들었다.


지금은 어때 나아졌어? 이제 시위는 포기했어?”

아니, 지금은 소꿉친구 생각과 사장 생각을 절반 씩 해. 다른 건 못하겠더라. 오늘은 그 친구를 찾아가기로 했어.”

만나주기는 해? 결혼했다면서?”

. 결혼해서 잘살지. 그래도 머릿속에 있는 것은 해결하고 싶어서.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도 못살면 뭐 하러 살어. 그렇게 살았던 건 그때로 충분해.”

그래서 만나서 어떻게 할 건데? 사정이라도 할 거야? 예전처럼? 이미 대학교 때 한번 써먹었다면서.”

알아서 할게. 내가. 다 방법이 있어.”


?선재는 광장에서 악수할 때처럼 말없이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선재가 아주 낯설게 느꼈다. 선재의 얼굴이 실미도 속에서 죽어간 어린 병사와 겹쳐졌다.


선재야. 배 안 고프냐. 밥이라도 먹을까? 너 뭐 좋아해?”

아니야. 그 친구 만나러 가야해. 당장. 혹시 나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그는 액수도 묻지 않고 지갑 속에서 대구로 돌아갈 버스비만만 빼고 모두 털어 선재의 양복 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어차피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에게 돈은 별 의미가 없었다. 선재는 그를 쫓아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선재는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서 그에게 소리쳤다.


섹스 못하는 인생은 별의미가 없어!”

뭔 소리하는 거야. 잘 살아. 대구 오면 연락하구.”


?고시원은 후텁지근했다. 그는 멍청하게 택배로 부치는 짐에 베개까지 함께 싸버린 것을 깨달았다. 베개가 없는 침대에서 불편하게 누웠다. 그는 선재가 중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좋아하는 사람도, 섬뜩한 구석도, 그는 자신이 중학생 시절에 비해서 무엇이 변했을까 생각했다. 친구라는 이름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도 생각했다. 그 사실은 그가 세 번째 시험에 떨어져 고시원 침대에서 혼자 촛불을 바라보던 시간에도 느꼈던 사실이었다. 변한다는 사실과 추억이라는 말은 같은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선재를 떠올리며 슬펐다. 선재의 섬뜩한 눈빛 속에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해서 더 슬펐다. 추억 속의 그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도 미안하지 않았다. 알았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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