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eerie
?
?
? 2011년에 슈퍼칼라슈퍼를 통해 내한공연을 하기도 했던 코코로지는힙스터들에게 가장 미움 받는 밴드 중 하나이다. 대중문화 전체를 놓고 보면 작은 일이겠지만, <스테레오검(Stereogum)>에서는 이에 대한 특집 기사까지 기획해 코코로지를 옹호하는 동료 뮤지션들의 변호 시리즈를 장황하게 실을 정도였으니 인디 문화 쪽에서는 뚜렷하게 눈에 띄는 현상이었음이 분명하다. <스테레오검>에 코코로지에 대한 응원(!) 코멘트를 실은 동료들의 면면은 화려하다. 예전부터 코코로지의 절친이라고 잘 알려진 앤토니헤거티(Antony and the Johnsons)부터 애니 클락(St. Vincent), 헤이든소프(Wild Beasts), 제이미스튜어트(XiuXiu), 니코뮬리, JD 샘슨(Le Tigre), 오노요코 등등.
?
? 이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코코로지의 음악을 왜 좋아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니코뮬리는“전 우주에서 영감을 끌어와 만든 음악…이 세상의 모든 향기, 의식, 문법이 눈 앞에서 펼쳐진다”고 표현했고, 헤이든소프는“유럽 바로크 시대부터 미국 두왑 시대까지, 그 시절 그 장소에서 실제로 만들어졌을 법한 일렉트로닉 음악을 듣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코코로지에 대한 혹평을 정확히 겨냥한 반박조의 글을 썼다. <피치포크(Pitchfork)>가 코코로지에게 준 낮은 평점에 분노해 서신까지 띄운 바 있는 앤토니헤거티는 “코코로지에 대한 거부는 여성주의, 생태주의, 인종 문제, 영적인 문제들에 대한 심층적 탐구를 거부하는 것… 남성 평론가들은 코코로지가 표상하는 시각적 이미지를 성적 대상화할 수 없어 그들을 무시하고 있다”고 썼고, 애니 클락은 코코로지의 안티들을 향해 “전형적인 아리안 족 근육맨들처럼 굴지 말라”고 썼다.
?
? 그러나 힙스터 평론가 & 음악팬들이 이런 뮤지션들의 평에 수긍했을까? 천만에 말씀이다. 힙스터들이 누구인가. 좋은 예술작품을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알아보고,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며, 희귀하고 진귀하며 독특한 것을 선호한다고 자부하는 쿨한 이들이 아니던가. 그런 그들이 ‘여성주의, 인종 문제, 생태주의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전 우주에서 영감을 끌어 온 아름다운 음악’을 깔아뭉개는 레드넥 같은 짓을 했다고 스스로 인정할 리가 없다. <피치포크>는 오히려 코코로지를 인종주의 밴드로 몰아 부치며 역공을 펼쳤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노래 가사에 ‘nigger’라는 단어를 썼다는 것이었다. <피치포크>는 ‘그들은 정말 문화맹(culturally blind)인 것인가?’라는 표현으로 ‘nigger’라는 단어를 함부로 쓴 그들에게 호통을 치면서, 코코로지가 아무리 유명한 예술가 친구들을 많이 두고 있고 나름대로 음악적 노력을 기울였다 해도 비난 받아 싼 존재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모호한 표현으로 취향 및 판단의 진입 장벽을 쌓는 것을 즐기는 <피치포크>로서는 상당히 예외적으로 분명한 선을 그은 셈이다. 그러나 정작 ‘nigger’란 단어가 등장하는 코코로지의 가사를 보면 <피치포크>의 호통은 사뭇 황당하다. 이 단어는 코코로지의 <Jesus Loves Me>라는 노래에 등장하는데 가사는 다음과 같다.
?
Jesus loves me?????????????????? ?? ???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셔
But not my wife ?????????????????? ? ? ? 하지만 내 아내는 사랑하지 않으셔
Not my nigger friends ?????????? ?? ? 내 검둥이 친구들도 사랑하지 않으셔
Or their nigger lives ????????????? ? ? 그들의 검둥이 인생도 마찬가지
But jesus loves me ??????????????? ? ? 하지만 나는 사랑하셔
Dat for sure ??????????????????????? ? ?? ? 그건 확실해
Cause the bible tell me so?????????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
? 미국 남부 컨트리 및 찬송가를 연상시키는 기타 연주 및 멜로디를 통해 전달되는 이 가사는 누가 봐도 명백하게 멍청한 기도문을 패러디함으로써 백인남성중심적인 전통 기독교 문화를 비꼰 것이다. 이 가사의 미학적 전략, 또는 문학적 효과에 대한 성패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가사의 맥락은 무시한 채 ‘nigger’라는 단어 하나에만 집착해 정치적 공격을 감행하는 것은 과민한 학부모 모임 또는 검열 지지 모임에서나 즐겨 썼던 사고방식이지, 마이너 인디 문화의 선봉에 서 있다는 이들이 취할 만한 논리는 아니다. 더군다나 극악한 폭력적 가사에도 불구하고 오드퓨처와 같은 랩 그룹은 쿨하다며 적극 지원 사격했던 잡지가 ‘이것만큼은 절대 용서 못한다’며 작정하고 달려들 만한 수준은 절대로 못 된다. 코코로지에 대한 이런저런 말들이 많지만 이들이 공공의 적이 된 주요 원인은 음악적 문제가 아니라 이 황당한 ‘nigger’문제 때문이다. 역사는 더 오래됐지만 요즘 <피치포크>를 좀 더 빤하게 베껴 먹는 것으로 유명한 <스핀(Spin)>은 코코로지의 앨범에 0점을 주는 감정적인 처사를 서슴지 않았다.
?
? 왜 일부 힙스터들은코코로지를 억지로 인종주의 밴드로 만들면서까지 한사코 자신들의 거부감을 정당화하려 했을까? 코코로지의 음악은 언뜻 들으면 요즘의 힙스터인디 취향에 매우 부합하는 것 같다. 과거 음악의 다양한 요소와 일렉트로닉 문법이 만나 새로운 느낌의 사운드스케이프를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방법론 속에 녹여낸 다양한 시대와 장소의 음악적 상징들은 헤이든소프의 표현대로 ‘그 시대, 그 장소에 일렉트로닉 음악이 있었다면 만들어졌을 법한 음악’처럼 들리거나, 혹은 주술적으로 그 시공간의 사람들과 접신하여 만들어 낸 일렉트로닉 음악처럼 들린다. 귀에 쏙쏙 박히는 구슬픈 멜로디를 전달하는 캐시디 자매의 기괴한 보컬은 과거와 현재의 정서를 동시적으로 전달한다. 문제는 그 방향이 현재의 힙스터 문화에서 선호하는 것과 결정적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캐시디 자매가 동시적으로 전달하는 과거와 현재의 정서 속에는 고통스러운 각성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의 음악은 힙스터들이 바라지 않는 방식으로 기괴해서 <500일의 썸머> 따위 영화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주술적이되 달콤한 낭만주의나 노스탤지어를 위한 주술이 아닌, 보다 넓은 관점에서 역사를 각성하게 하는 구도자의 주술처럼 들린다. 각성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믿는 이들에겐 불필요하다. 때문에 ‘과거 모든 대안적 하위 문화의 요소들을 페티시화’함으로써 세상을 모두 이해했다고 여기는 힙스터문화 내에서, 그들의 쾌락 코드를 위반하는 코코로지의 예술적 전략은 불경스러운 것이 된다. XiuXiu의 제이미스튜어트가 남긴 말은 이런 분위기를 방증한다. “코코로지는 적어도 인종 문제를 솔직하고 용감하게 인종 문제 자체로 다룬다… 반면에 작금의 뻔뻔한 아이비 리그 취향 아프로-팝 도둑들은 어설픈 흑인 흉내로 자신들이 흑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의 말은 갈등/균열/한계를 직면하는 대신, 모든 빈틈을 낭만적 페티시즘으로 메워 모래성 같은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힙스터 문화의 약점을 정확히 파고 든다. 현재의 힙스터 문화에서 중요한 것은 인종 문제에서든 성 문제에서든 계급 문제에서든 그것을 진짜로 어떻게 돌파하느냐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진보적이고 쿨하게 보이느냐’이다. ‘내가 인종주의자가 아닌 이유’, ‘내가 성차별주의자가 아닌 이유’는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가 옳지 않아서라기보다는 ‘내가 그렇게 쿨하지 못할 리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때문에 상당수의 힙스터들은 종종, 이미 힙스터에 대한 많은 메타 비평들이 비꼬듯, 실제로는 꼴통 같은 짓을 하면서도 ‘꼴통은 쿨하지 못한 것인데 내가 그런 꼴통일 리 없다’는 식의 자아과잉적 변명으로 자신을 정당화한다. 이렇게 ‘완벽하게 쿨한’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무언가는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 코코로지는 이런 메커니즘의 사고 회로를 통해 엉뚱하게 인종주의자들로 몰리고 말았다.
?
? 자아도취를 방해하는 각성에 대한 힙스터들의 거부감에 희생양이 된 것은 코코로지만이 아니다. 래퍼루페피아스코는 2012년 하나의 문화 코드로 굳어진 힙합의 폭력적/여성혐오적 언어 사용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촉구하는 노래 <Bitch Bad>를 발표했는데 <피치포크>는 이 노래가 ‘일차원적인 윤리적 설교’라며 폄하했고, <스핀>은 역시 한 술 더 떠 이 노래에 0점을 선사했다. 전통적인 ‘백인 잡지’인 <스핀>은 이 노래에 0점을 주면서 ‘진정한 힙합이란 이런 게 아니’라는 모호하면서도 주제 넘는 코멘트를 달았고 성난 루페피아스코 팬들의 보이콧 대상이 되었다.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가 지나치게 노골적일 경우, 미학적으로 유치해질 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힙스터 평론가들이 그런 메시지의 표현 자체를 늘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라디오헤드로 철학하기> 따위의 쓰레기 책까지 양산하게 만든 라디오헤드의 “우리는 젊은이들의 피를 빨아먹지. 젊은 살덩이를 원해.” 같은 가사는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피치포크>는 이런 라디오헤드에 대해서는 자신들 특유의 쿨한 잘난 척도 내던지고 기사 타이틀을“라디오헤드 새 앨범이다아아아아아아!”로 뽑을 정도로 유치한 빠심을 보여준 바 있다. 힙스터들의 이런 설득력 없는 이중성은 민주당에 투표하기 혹은 정치가와 자본가 욕하기 정도의 손쉬운 정치적 각성에만 ‘진정성’을 부여해 과도한 환호를 보내고, 그 이상의 각성을 요구해 자신들의 힙스터 파티 디제잉을 망칠 수 있는 메시지에는 온갖 부정적 딱지를 붙여 거부하는 그들의 한계를 드러낸다. 모든 장르를 감상하고, 모든 문화를 존중하고, 모든 변명을 다 동원하는 포스트모던 시대 첨단 주자들의 메뉴에서 유일하게 빠져 있는 것은 자기 성찰인 듯하다. 결국, 코코로지에 대한 미국 힙스터들의 거부감이 ‘더 큰 성찰에 대한 거부’라는 앤토니헤거티의 지적은 정확하다. 그가 빠뜨린 것이 있다면 성찰을 거부하는 속내를 감추려는 힙스터들의 절박함이 모함과 마녀사냥의 판을 더욱 키웠다는 점에 대한 설명일 것이다.
?
eer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