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와 현재의 평가가 가장 엇갈리는 왕은 광해군일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폐위되었기에 왕 취급도 안 해주었고, 명나라의 은혜를 저버린 것, 폐모살제(계모를 폐하려 하고 동생을 죽인 것), 민생을 도탄에 빠뜨린 것 등의 실책을 꼽았다.
일제강점기부터 그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었다. 특히 강조되는 것은 외교 부분으로 중화세계관에 빠져 있던 사대부와 달리 조선을 지키기 위한 실용중립외교를 했다는 것이다. 폐모살제 부분은 그 시대에 흔한 정치 싸움 정도로 치부된다. 그를 몰아냈던 서인들이 호란과 그 후에 보여준 모습 때문에 더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민생은 동의보감 보급이나 대동법 실시 등 좋은 면을 부각시킨다.
이렇게 광해군의 모습은 자기 이익만 챙기는 반대파에 맞서 조선을 지키고 백성들을 위했던 왕으로 변했다. 최근에도 영화로 나올 정도이니 그의 대중적인 인기가 어떤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보기엔 그의 치명적인 실책이 있다. 바로 궁궐병이다.
임진왜란으로 궁궐은 거의 타버렸고 복구가 필요했다. 왕조국가에서 이 필요성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경복궁 복원에 심혈을 기울이고 숭례문 전소에 전국민이 충격을 받지 않는가. 때문에 선조부터 창덕궁을 재건하기 시작했고, 광해군에게로 이어진다. 광해군은 여기에 창경궁을 재건했으며 덕수궁을 수리했다. 여기까지는 전후 복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재건이 끝난 광해군 9년, 1617년부터 경덕궁과 인경궁, 자수궁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 규모도 이전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경덕궁은 1500칸이었고 인경궁은 무려 5500칸이나 되는 규모를 자랑한다. 경복궁이 700칸이었던 때다.
내외적으로 해결해야 될 문제는 쌓여있었다. 팔도가 전쟁터가 됐던 임진왜란의 복구는 물론 북방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군비를 갖춰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궁궐에 큰 비용이 들어간 것이다. 재원 조달이 쉬울 수가 없었다. 전국에 조도사가 파견돼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더 거두었다. 이들이 저지른 피해 역시 적지 않았다. 그러고도 모자라 공명첩이 다시 등장한다. 임진왜란 때는 전쟁을 위해 어쩔 수 없었겠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그저 궁궐을 짓기 위해 최대한 기부를 받고 그 대가로 벼슬을 나누어 준 것이다.
광해군은 선조의 견제로 인해 힘들게 왕이 되었다. 선조가 총애하던 아들은 언제나 그가 아니었고, 임진왜란이라는 급박한 상황 덕분에 겨우 세자가 될 수 있었다. 왜란 때는 분조를 이끌고 전쟁을 지휘했으며 위아래에서 인정받았지만 선조의 견제는 더 심해졌다. 말년에는 몇 살 되지도 않은 영창대군을 아꼈고 조정 내에서도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파가 생길 정도였다. 이렇게 힘들게 왕이 된 이상 왕권에 대한 집착이 나타날 만 하다. 궁궐 건축은 왕권 강화를 하는데 필수 중 하나이며 궁궐 공사는 광해군의 왕권에 대한 집착과도 연결된다.
중립 외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외교는 그저 말을 잘 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특히 전쟁을 대비할 때는 더 그렇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실익을 챙기는만큼 침략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 당시는 왜란으로 조선의 국방이 크게 약화된 때이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 북방의 수비를 강화하는 데 드는 비용 역시 적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시기 동안 궁궐 공사가 계속 이어진 것이다.
광해군부터 인조 대까지 북방을 지켰던 장만은 일찌감치 공사 중지를 건의했다. 처음 광해군은 이렇게 대답했다.
“미리 공사를 중단함으로써 인심이 더욱 붕괴되도록 한단 말인가. 경은 이 점을 생각하지 못하였다. 내가 어찌 한갓 큰 공사를 갑자기 중단시키는 것을 어렵게 여기는 것이겠는가. 가을 이전에는 목전에 극도로 위급한 사태가 벌어지지는 않을 듯 하니 다시 더 공사를 감독하고 이런 말은 꺼내지를 말라.” - 광해군 10년(1618) 6월 15일
이런 모습에 장만은 계속 사직을 청했고, 광해군은 그걸 막으며 계속 북방을 맡겼다. 하지만 공사는 끝까지 밀어붙였다. 4년이 지난 후 다시 장만이 공사 중지를 건의하자 이렇게 답한다.
“"사직하지 말라. 가을철이 이미 닥쳐서 오랑캐 기병의 세력이 더욱 성해지고 있다. 경이 이미 나랏일이 위급한 줄을 알았다면 왜 올라오지 않고 물러가서 큰소리만 치는가. 영건하는 일에 대해서 경의 생각이 이와 같았다면 무오년(1618) 사변이 생긴 초기에 어찌 말하지 않았는가. 지금은 이미 거의 다 완성되어서 전에 들인 공력을 포기하기가 어렵다." - 광해군 14년(1622) 6월 29일
이것이 궁궐에 대한 광해군의 의지였다.
공사는 인조반정 때까지 계속되었고, 인경궁은 완공되지 못 하고 파괴되었다. 광해군 대에 있었던 많은 일이 진행되는 동안 궁궐은 중단 없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내외적으로 힘들었던 그 시절, 나라의 수많은 인력과 물자가 그의 왕권 강화에 쓰였다.
그의 공과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논의가 계속될 것이다. 그에 따라 그가 비운의 명군이었는지 다른 왕과 다를 바 없었는지 쫓겨날만한 폭군이었는지가 바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궁궐 건축은 그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그의 큰 실책이다. 그의 업적으로 평가되는 민생 안정과 중립외교에서도 말이다.
과거의 군주는 현대의 지도자에 대입되는 경우가 많다. 광해군의 경우 신하들에게 쫓겨난 만큼 보수 세력에 의해 쓰러진 개혁자의 모습이 대입된다. 앞뒤로 선조와 인조가 있어서 더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실책 역시 많고, 그를 평가함에 있어 이 역시 잊으면 안 된다. 그 때의 모습을 현재에 평가하는 것이지 현재에 만든 이미지를 그 때에 덧씌우는 게 아니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