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로큰롤> 코너에 대해
롤링스톤 지는 언젠가 미니스트리의 음악을 평하면서 ‘순수한 악은 언제나 로큰롤의 영원한 목표’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신과 악마를 분리시켜 놓은 기독교 문화 기반의 사회에서 반(反)문화, 혹은 대안 문화로 등장하는 것들에 악/악마의 비유가 덧씌워지는 것은 어느 정도 필연적이다. 그러나 유독 대중음악, 그 중에서도 특히 로큰롤 장르가 이런 악/악마의 이미지를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뮤지션들이 기독교적 이원론의 긴장감을 예술적 동력으로 삼는 데 가장 적극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도깨비 분장을 한 채 그르렁거리는 일차원적 위악으로 나타나든, 동양문화 등에 심취해 이원론적 세계관을 폐기하는 탈근대적 탈주로 나타나든, 혹은 기존의 선악 구분을 공격하기 위한 전략적 비유로 나타나든 간에, 악마가 로큰롤 역사에서 가장 애용되는 얼터 에고임은 분명하다.
외면하고 싶은 지옥의 교차로 ? Sonic Youth의 <Death Valley 69>
미국이 낳은 불세출의 연쇄살인범 찰스 맨슨. 미국의 많은 연쇄살인범들 중에서 그가 단연코 업계(?)의 대표주자로 톱스타 뺨치는 명성을 떨친 이유는 ‘맨슨 패밀리’라는 끈끈한 사교집단을 이끄는 교주였기 때문이다. 맨슨 패밀리의 연쇄살인은 개인적 비행의 성격을 뛰어넘어 모종의 철학과 믿음을 수행하기 위한 조직적 의식 행위였다. 그들에게 살인은 범죄가 아니라 무지몽매한 세상을 새로운 방향으로 견인할 정화의 절차였다. 원래 대부분의 연쇄살인은 ‘짐승 같은 짓’이라는 흔한 오해와 달리 오히려 인간 고유의 승화 욕구가 반사회적으로 드러난 결과에 가깝긴 하지만, 이런 속성을 맨슨 패밀리만큼 극적으로 만천하에 드러낸 사례는 없다. 음악계의 악동들은 이런 맨슨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해 왔는데 소닉 유스의 <Death Valley 69> 역시 맨슨을 다룬 것으로 유명해진 노래다. 이 노래의 가사는 맨슨 패밀리 일당들의 1인칭 시점에서 진행된다. 소닉 유스 멤버들 특유의 이성적 아우라로는 다소 표현해내기 힘들 것 같은 살인마의 즉물적 광기는 게스트로 참여한 뉴욕 출신의 실험적 뮤지션 리디아 런치(Lydia Lunch)가 보완해서 표현해 주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1인칭 시점 서술은 살인마들에 대한 직접적 비판과는 거리가 먼 접근법이고, 그래서 이 노래는 맨슨 패밀리에 대한 악취미적 헌정가로 종종 오해받기도 했다.
그러나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듯이 소닉 유스는 짜고 치는 마귀놀이를 하는 밴드가 아니다. 이 곡이 실린 소닉 유스의 두 번째 앨범 <<Bad Moon Rising>>은 으스스한 앨범 커버와 제목이 보여주듯 사악한 주제어와 어두운 기운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모든 장치를 제어하고 있는 것은 미국 사회의 이면을 까뒤집는 소닉 유스의 메타적 관점이다. 미국의 음악 저술가 마이클 애저레드(Michael Azerrad)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노래가 ‘레이건 시대에 공화당이 펼친 가족주의적 캠페인에 대항해 미국의 비틀린 가족상으로 맨슨 패밀리를 내세운 것’이라고 말했다. 노래에 대한 보다 명쾌한 해설은 소닉 유스 본인들의 입을 통해 나왔다. 소닉 유스는 2006년 Filter지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84년에 우리는 미국과 유럽에서 투어를 하며 미국 밴드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점차 깨닫게 되었다. 또한 우리는 히피의 이상이 실제의 차가운 세상과 맞닥뜨려 만들어 낸 교차로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도 숙고했다. 우드스탁과 알타몬트의 교차로이기도 한 그곳은 바로 찰스 맨슨의 데쓰 밸리였다.”
소닉 유스에게 찰스 맨슨은 보수 주류 문화와 60년대 반(反)문화 진영 간에 존재했던 지옥의 교차로를 폭로하는 의미심장한 지점이었다. 맨슨이 브라이언 윌슨, 닐 영 등과도 꽤 친분을 나눈 골수 히피였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맨슨은 미국 주류 사회가 감추고 싶어 하는 어둠의 자식이었던 동시에, 60년대 저항문화를 이끈 히피들의 처참한 엔딩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사랑과 평화의 상징이자 한때 서구 사회를 혁명의 단꿈에 젖어들게 만들었던 히피 문화는 맨슨 패밀리의 손에서 엽기적 폭력의 들러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맨슨 패밀리의 교리는 소닉 유스의 ‘교차로’라는 표현에 딱 들어맞는 잡종 구성의 레시피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유방임적 문화와 권위적 조직 문화를 조합했고 기독교적 종말론과 비틀스를 결합시켰으며 사랑과 증오, 구원과 폭력을 마구 뒤섞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선악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의 ‘창의적’이고 ‘대안적’인 기준은 1969년 만삭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는 피투성이 의식으로 결론을 맺었다. 이것은 단지 미친 맨슨 패밀리만의 문제였을까? 바로 그 해에, 맨슨보다는 분별력이 있었던 대다수 히피들마저도 알타몬트 공연에서 헤아릴 수 없는 기물 파괴와 절도, 무질서, 그리고 결국은 살인사건까지 경험하며 히피 지옥을 맛봐야 했다. 모두를 유토피아에 대한 자신감으로 들뜨게 했던 우드스탁 공연이 개최된 지 고작 4개월 만이었다. 1969년, 그렇게 히피 시대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런 맥락을 통해 보면 그저 살인마들의 미친 읊조림인가 싶었던 <Death Valley 69>의 1인칭 가사도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난 그 동안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어. 당신이 맞아. 당신이 맞아. 그래서 우리는 이 깊은 계곡-데쓰 밸리-에 들어왔어...그녀(she)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어. 어쩔 수 없었어. 그래서 그것(it)을 쳤어. 그것(it)을 쳤어. 원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주류 사회가 심어준 미몽에서 벗어나 구원의 메시지를 접했다고 생각한 맨슨 패밀리는 더 이상의 사고를 멈추고 정해진 종교적 결말의 시나리오를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사람은 일개 사물(it)이나 다름없었고 모든 학살극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일 뿐이었다. 모종의 ‘최후의 심판’을 바라는 모든 형태의 묵시록적 세계관은 필연적으로 이런 사이코패스적인 귀결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소닉 유스는 <<Bad Moon Rising>>의 86년 영국 CD 발매본에서는 이런 묵시론적 세계관 자체를 조소하는 듯한 <Satan is Boring>이라는 곡을 <Death Valley 69>의 바로 다음에 싣기도 했다.
묵시론적 세계관에 대한 회의는 이 세계를 한 방에 구원해 줄 메시아나 도깨비 방망이 따위를 믿지 않음을 뜻한다. 요즘 세상에 그런 걸 누가 믿느냐고? 자신이 생각하는 해답, 자신이 중요시하는 가치가 세상 모두에게 구원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고는 본질적으로 도깨비 방망이 숭배와 다를 바가 없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 앞에서 눈을 감아 버리고, 지속적인 성찰과 실험은 피곤하다며 내버린 채 자신의 답안에 대한 편리한 믿음을 유지하는 것은 미신적 사고와 얼마나 다를까. 소닉 유스의 <<Bad Moon Rising>> 앨범 커버는 최첨단 도시 뉴욕의 야경 속에 사악한 표정의 허수아비가 컬트 교주와도 같은 위용으로 불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첨단의 시대에 사는 우리는 합리적이고 투명하게 사고할 거라는 착각, 그게 바로 소닉 유스가 생뚱맞게도 뉴욕 한복판에 허수아비를 세워놓은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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