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by eer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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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모자라. 배고파. 피를 안 주면 재미없을 거야.”
1994년, 서태지와 아이들(이하 서태지)의 3집 수록곡인 ‘교실 이데아’를 거꾸로 들으면 위와 같은 말이 나온다는 괴담이 전국을 휩쓸었다. 미국의 일부 보수적 개신교도들에게서 시작된 ‘로큰롤과 뉴에이지 문화 사탄 음모설’ 유행의 현지화 버전이었던 이 해프닝은, 당시 한국 사회에서 서태지의 위치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다. 서태지는 주류 가요계에서 큰 성공을 거둔 ‘보편적’ 스타인 동시에, 10대 자녀들을 둔 학부모들에게 영미권의 블랙 새버스나 주다스 프리스트가 그랬던 것과 비슷한 위기감을 심어주는 ‘위험한’ 스타이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주류 가요계에서 흔치 않았던 랩과 록 장르의 요소가 강하게 두드러진 서태지의 음악은 ‘무국적 음악’이라는 오명 속에서 기성세대 일반에게 정체불명의 불온한 음악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컸고, 그러한 정서는 이 ‘악마 파동’의 확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서태지 음악의 정체불명성과 불온함에 대한 비판이 고루한 어르신들의 전유물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당시 음악 좀 듣는다 하는 정통 록/메탈 팬들이 서태지에게 보낸 비판적 시선 역시 만만찮았다. 서태지가 댄스와 록을 섞어버리며 장르의 순수성을 위반한 데다, 힙합/댄스/발라드/록을 총망라하는 슈퍼마켓 식 구성의 앨범으로 상업적 단맛을 골고루 누렸기 때문이었다. 서태지의 시나위 멤버 경력과 개별 곡들의 만만찮은 팝적 완성도는 그의 재주를 인증하는 근거로 통용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배신자’라는 낙인을 더욱 뚜렷하게 해 주는 근거이기도 했다. 어르신들에게 랩과 록이라는 장르 자체가 낯설었다면, 음악 마니아들에게 낯설었던 것은 서태지의 음악을 이루는 개별 요소가 아니라 그것을 섞어 사용하는 서태지의 방법론이었다. 헤비메탈계에 몸담고 있던 시절부터 흑인음악/댄스음악에 대한 애정으로 주위와 마찰을 겪었다던 서태지는 컴퓨터를 이용해 자신이 매력적으로 느낀 각 장르의 요소들을 위계 없이 섞어버렸고, 이런 비선형적 디지털 제어로 음악을 만드는 독단적 1인 밴드의 방식은 당시엔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지금보다 훨씬 보기 드문 것이었다. 명반이 나왔다고 호들갑을 떠는 상당수의 긍정론자들 앞에서 비판론자들은 비틀스나 레드 제플린 등 그들이 모델로 삼고 있는 명 아티스트들에게서 전례를 찾을 수 없는 ‘통일성 없는 앨범 구성’과 ‘장르 규정의 불가능성’을 문제 삼으며 난색을 표했다. 위대한 해외 아티스트들의 음악적 유산을 ‘다양하게, 지능적으로 베껴서’, ‘정보에 어두운 한국 팬들을 등쳐 먹으며’ 부와 명예를 축적하는 사기꾼이란 의견도 상당했다.
서태지의 음악이 정말 ‘새로운’ 음악이었는지, 아니면 ‘새로운 척’ 하는 사기성 음악이었는지는 또 하나의 합의 불가능한 화두겠지만, 각각에 해당하는 근거들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짚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을 포함한 서태지의 전반기 음악이 보여주는 특징은 그의 디지털적 방법론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데, 각 전통 장르의 요소를 직관적으로 뒤섞어 자신만의 팝적 감각을 얹는 그의 방식은 그 당시보다 오히려 요즘에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인터넷 시대’스러운 방식이다. 서태지의 전반기 음악은 최근 북미 인디 음악계의 신성으로 꼽히는 그라임스(Grimes)나 크로매틱스(Chromatics) 등과 음악적 방법론, 혹은 경력 면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보여준다. 어느 하나의 장르 전통과 윤리에 천착하지 않고 자신의 직관을 기준으로 선별한 요소들을 디지털 기술로 재배열/믹스하는 방식은 인터넷 시대에 접어들어 급증하기 시작한 음악적 전략이다. 인터넷의 폭발적인 발전은 ‘뉴욕에 살면서 아프리카 음악의 영향을 받고’ ‘몬트리올에 살면서 K-pop을 참고하는’ 상황을 가능하게 했고, 더불어 재치와 눈썰미로 승부하는 음악에 대한 가치평가 상승 효과도 가져왔다. 하나의 장르에서 장인적인 모습을 보이기보다 이런저런 클리셰를 조합해 그럴싸한 콜라주를 만들어내곤 했던 서태지의 작업 방식은 이런 요즘의 흐름과 상통하는 데가 있다. 물론 서태지의 음악이 최근 북미 인디계의 재치꾼들에 비해 내면화 과정을 덜 거친 1차원적 흉내의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는 본인의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하고 싶은 음악을 한다’는 것이 (영미권에서) 공인된 ‘좋은 음악들’ 중 하나의 스타일을 골라잡아 따라 한다는 의미인 경우가 많았던 한국 현실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불가피한 환경적 요인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결국 서태지가 동시대 국내 록 뮤지션들이 가지지 못한 모종의 디지털적 감수성으로 음악에 대해 독특한 접근법을 택한 것만은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근래 전 세계의 베드룸 뮤지션들이 기타를 직접 메지 않고 밴드 동료를 구할 필요도 없이 맥북 클릭질 몇 번만으로 음악을 뚝딱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듯, 서태지는 구식 아타리 컴퓨터로 기존 밴드 형님들과의 소통에서 이룰 수 없었던 것을 성취했던 것이다.
사실 이런 뮤지션의 전략을 평가하는 일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장르 전통에 충실한 음악은 평가의 기준이 비교적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만, 그렇지 않은 음악은 평가하는 사람이 자신의 음악관과 지향에 따라 기준을 세우고 이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작업이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장르 커뮤니티의 전통과 아날로그 소통을 벗어난 디지털 방법론의 탈주가 음악에 어떤 영향(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을 미치는가? 이것은 서태지라는 뮤지션을 흥미롭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지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국내에서 벌어진 적도 없이 무의미해져 버렸다. 서태지를 둘러싼 논쟁은 취향 싸움 수준에서 맴돌았고, 서태지 자체도 이제 전통적 형태의 밴드 록으로 선회한 지 오래다. 그가 초석이 됐다고 평가 받는 아이돌 댄스 그룹 문화는 이제 ‘무국적 음악’이라는 비난에 시달리는 대신 삼성 반도체 다음 가는 한국의 수출품으로 각광받고 있고, ‘진정한(?!) 로커로 돌아온’ 그는 팬덤의 배타적 비호 아래 긴장감 없이 메인스트림 록 스타 ‘서대장’으로 군림하고 있다. 그는 아무런 경계도 위반하지 않고 이젠 아무도 그를 악마나 배신자로 부르지 않는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교차로에서 나름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동시에 성취했던 5집(솔로 1집)과, 느닷없이 백 밴드를 대동하고 ‘한 놈만’ 베끼기 전략으로 선회한 6집 사이의 불연속면에서부터 그가 거꾸로 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그러나 40대 중반의 그가 결혼을 발표한다면서 사용한 문체를 보면, 그의 시간은 여러모로 거꾸로 가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