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로큰롤] 서부 마녀와 동부 마녀의 상이한 예술 개론 - 코트니 러브와 라나 델 레이

by 내이름은김창식 posted May 15,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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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마녀와 동부 마녀의 상이한 예술 개론

-코트니 러브와 라나 델 레이

-by eerie

http://patricidaljubilee.egloos.com

 

 

‘내 인생은 겨울이었어/길에서 만난 남자들과 함께 한 시간만이 유일한 여름이었지/빠르게 살고 젊게 죽고 거칠게 살며 즐기는 것/난 예전 우리 미국의 모습을 믿어/넌 너만의 인생을 느껴봤니?/난 느꼈어/난 미쳤지만 자유로워/’

 

이미 골수 힙스터들에게 버림받은 아이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인디’, ‘힙스터’ 코드를 달고 앨범을 300만장 넘게 팔아치우며 메이저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는 스타 반열에 오른 라나 델 레이. 상당한 공력을 들인 그녀의 싱글 <Ride>의 뮤직비디오는 근래 나온 모든 형태의 영상물을 통틀어 가장 노골적인 히피 노스탤지어를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이 뮤직비디오를 통해 낯선/나이든/게다가 못생긴 폭주족 남성들과 정처 없이 동행하며 충동적으로 갱뱅하고 노는 것을 찬미한다. 말인즉슨, 자신은 늘 대양과 같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길에서 만난 남성들과 아무런 제약 없이 (두 가지 의미로) 마구 달리면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찾았다는 것이다. 뮤직비디오의 영상은 노출은 심하지 않으나 정서상 영화 <<Easy Rider>>의 에로버전이라 불러도 좋을 수준이다.

 

이 노래의 이미지를 가지고 라나 델 레이가 실제 아웃사이더라거나 소외층 출신이라고 추론하면 오산이다. 라나 델 레이는 1986년 대도시 뉴욕의 초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란 아가씨이다. 영세한 인디 작업의 소산으로 홍보 콘셉트를 잡았던 그녀의 최근 히트 앨범 역시 실제로는 범부들이 알 수 없는 모종의 과정을 통해 무명의 신인이 끌어오기 힘든 베테랑 작곡가와 기술자들이 총동원되어 만들어지고 메이저 레이블에서 유통된 명백한 메이저 앨범이다. 이 때문에 그녀는 정식 데뷔 직후부터 ‘인디 사기꾼’, ‘가짜 힙스터’라는 맹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라나 델 레이는 진지한 인디 아티스트로 인정받기 위해 가볍게 잘 웃는 소녀였던 자신의 10대 시절 이미지를 갈아엎었고 심지어 하이톤이었던 목소리조차 저음으로 깔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왜, 있는 집 따님의 신분으로 하필 비주류 시장인 인디/힙스터 문화의 영역에 들어오려고 그토록 ‘없는 척’을 한 것일까? 세련된 북동부 대도시 뉴욕의 상류층 소녀는 어쩌다가 남서부의 매춘부 흉내가 진정성을 담보한다고 믿게 된 것일까? 라나 델 레이는 뮤직비디오에서 이렇게 읊조린다. ‘I believe in the country America used to be’. 그 예전 미국 남서부에 무엇이 있었기에?

 

한국 어르신들의 귀에도 익숙할 미국 히피들의 60년대 송가 <San Francisco>에서 스코트 매켄지는 이렇게 노래한다. “혹시 샌프란시스코에 가시거든/머리에 꽃을 꽂는 것을 잊지 마세요/만약 샌프란시스코에 가신다면/거기에서 정말 선량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실 거예요.” 1965년, 그 샌프란시스코의 히피 코뮨에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60년대 최고의 사이키델릭 밴드 그레이드풀 데드(Grateful Dead)의 로드매니저였던 나름의 네임드 히피 행크 해리슨, 어머니는 그의 아내 린다 캐롤이었다. 부모는 히피답게 아이의 이름을 ‘사랑(Love)’으로 지었다. 러브 미셸 해리슨. 러브는 부모의 히피 철학에 따라 아동학대와 구분되지 않는 수준으로 방치되었으며 현대적 개념의 양육과 위생 관리를 받지 않았다. 러브는 부모의 지인들로 이루어진 코뮨 내에서 ‘꽃같이 행동하고’ ‘봄날처럼 춤추기를’ 요구받았고 코뮨 밖에서는 냄새나는 ‘오줌 소녀(pee-girl)’로 놀림 받았다. 아버지 행크 해리슨은 러브가 네 살 되던 해에 LSD로 ‘인식의 문’을 열어주었고 히피 지인들은 러브에게 아름다운 상상만을 하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아이는 사흘이 멀다 하고 악몽을 꾸었다. 아버지가 열어 준 인식의 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것은 귀신, 해골, 비틀린 내장, 오염된 우유 등의 이미지로 가득한 공포의 세계였다. 자신의 부모를, 특히 아버지를 싫어했던 이 아이는 후에 자신의 이름에서 성을 지우고 원래 퍼스트 네임이었던 ‘러브’를 성으로 사용하며 그 뜻에 전혀 걸맞지 않은 언행으로 자신의 출생 배경을 냉소했다.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는 저돌성과 폭력성으로 끊임없는 악명을 떨쳐 온 90년대 그런지 여왕(혹은 마녀) 코트니 러브는 그렇게 탄생했다.

 

철딱서니 없는 히피 부모의 실패한 실험 결과물이었던 코트니 러브에게 주류 사회는 물론, 비주류 사회 역시 애초부터 은신처가 될 수 없었다. 이중소외에 의한 복잡한 분노는 그녀를 이율배반적인 인정욕구에 불타게 만들었다. ‘마이너 중의 마이너’인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주류에서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들끓게 된 것이다. 그녀는 일찍이 인디 펑크계에서 활동하면서도 ‘할리우드 여배우’와 ‘록 스타’가 동시에 되겠다는, 일반인의 관점으로도 과대망상적인 데다 모든 형태의 상업적 성공을 경원시하는 펑크의 관점에서는 경멸스럽기까지 한 목표를 세웠다. 파란만장했던 무명 시절 온갖 지저분한 클럽에서 스트리퍼로 돈을 벌며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해 ‘신학’을 공부한 경력 또한 괴이하기 짝이 없다. 천박함과 진중함이 뒤섞인 모자이크는, 태어나자마자 빠졌던 지옥 같은 진창을 벗어나기 위해 사정없이 좌충우돌하다 생긴 그녀 특유의 행동양식이었다. 이는 그녀가 쓴 가사에서도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2004년 발매한 솔로앨범 수록곡 <Sunset Strip>에서 코트니 러브는 ‘이 악몽들을 몰아내기 위해/정말로 반짝여야 해/정말로 빛나야만 해/’라고 노래했다.

 

비타협적인 태도와 공존하는 저돌적 상승욕구는 그녀를 주류 문화에서 수용할 수 없는 위험한 캐릭터로 만들었지만 펑크와 페미니스트 커뮤니티 역시 그녀를 비판적으로 본 것은 마찬가지였다. 코트니는 스스로 자신을 ‘영원한 페미니스트’로 규정했지만 페미니스트 커뮤니티의 윤리도 그다지 지킬 생각이 없었고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펑크 운동인 ‘라이엇 걸’ 운동의 일원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주류/비주류 문화 양쪽의 한계를 온몸으로 체험한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의지할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날카로운 시선에 걸려든 모든 종류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고발의 방식은 자신의 남편인 커트 코베인을 포함해 많은 90년대 아티스트들이 한 것처럼 정중하고 PC한 방식이 절대로 아니었다. 95년 코트니의 밴드 Hole의 공연장에서 있었던 일화. 코트니는 관객 중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Bitch!”라는 욕설을 날리자 관중들에게 다함께 자신을 향해 “Bitch!”라고 외치도록 부추겼다. 모두가 “Bitch!”라고 신나게 외치자 그녀는 “그럼 이번에는 깜둥이라고 외쳐 봐.”라고 요구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관중들. 코트니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또 다시 말했다. “유태놈이라고 외쳐 봐.” 관중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런 관중을 향해 코트니가 실룩거리며 내뱉은 말은 “바보새끼들.”이었다. 코트니는 자신에 대한 성차별적 마녀사냥에는 자신 있게 앞장서며 센 척 하다가, 인종차별 같이 좀 더 외연이 분명한 사회적 금기 앞에서 갑자기 양순한 시민인 척 하는 사람들의 비겁함을 꼬집은 것이었다. 코트니는 이것을 얌전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 “불쾌감은 세상 현실의 당연한 일부”라 생각하고 “유토피아보다 디스토피아를 원하는” 그녀에게 상호 유쾌한 사회적 합의란 거짓이거나 일시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언론과 대중은 코트니의 거친 방법론만을 가십거리로 삼기에 바빴지만, 그녀의 언행은 거친 만큼 늘 최전방 구역을 건드리는 첨예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상류층 딸내미가 유토피아로 상정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내던지면서 달려간 그 길바닥이, 그 곳에서 자란 진짜 히피의 딸에겐 벗어나기 위해 그토록 악다구니를 썼던 진창이었다는 현실. 코트니 러브가 온몸으로 행했던 무려 20년 전의 고발이 무색하게, 어떤 이들은 또 다시 기꺼이 라나 델 레이의 낭만적 비주류 포장에 속아주었다. 그 단순한 낭만주의가 어떤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라나 델 레이 본인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예술관을 두고 “현실은 언제나 내가 원하는 바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판타지를 그린다. 내게는 판타지가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예술이 현실도피이자 일탈욕구의 충족 도구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그럴싸하게 들릴 법한 말이다. 그러나 <Ride>는 현실에 대한 왜곡이지 판타지가 아니다. 판타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현실의 역학관계만을 담고 있으며 메시지는 오로지 그에 대한 가치판단을 미화하는 데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목적이 일탈욕구의 충족이라면 그건 예술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포르노에 대한 정의에 가깝다. 이미 일탈한 자에게는 현실도피성 일탈욕구가 있을 수 없다. 현실과 예술이 정확히 구분되어 있는 상태에서 안전하게 자신의 현실 속에 예술을 끌어들여 즐기는 것은 경제력과 계급의 안전망으로만 확보 가능한 자유이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미 중산층 여피가 된 먼 옛날 히피족들은 미국 사회의 소비문화를 지탱하면서 그것을 진정한 자유로 받아들이고 산 지 오래다. 라나 델 레이의 <Ride>가 반영하는 히피들의 진실이 있다면 바로 그런 아전인수 철학이 그들의 현재라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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