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를 보는 소년_월레스와 그로밋
※멍덕 주의
만화 속 캐릭터 중 가장 키우고 싶은 동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월레스와 그로밋]의 강아지 그로밋이 아닐까? 수수하지만 귀여운 외모와 다재다능함에 주인을 향한 충성까지 뭐하나 빠질 데가 없는 그로밋은 단언컨대 완벽한 강아지이다. 단편 시리즈인 [월레스와 그로밋]은 이 완소강아지 그로밋과 약간은(약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리바리한 주인 월레스 콤비가 이끌어나가는 애니메이션이다. 국내에선 89년부터 95년까지의 작품 3개(화려한 외출, 전자바지 소동, 양털도둑)를 묶어 특선 시리즈로 방영했었는데 이후에도 후속편이 몇 개 더 나왔지만 사실상 우리의 추억 속에 있는 것은 이 세 작품일 것이다.
시리즈들은 보통 월레스와 그로밋이 그들에게 일어난 사건을 해결해가며 스토리를 만들어간다. 그런데 말이 함께이지 사실 주인 월레스는 문제만 일으키고 모든 해결은 그로밋이 떠맡는다. 자신을 위협하다 동전이 떨어져 멈춘 기계에 다시 동전을 넣어주는가 하면 보석강도를 집에 들여놓고는 그의 가식에 속아 그로밋을 차별한다. 이 에피소드에선 생일선물로 그로밋에게 전자바지를 선물하는데 이 선물은 자기대신 산책을 시켜줄 용도로 산 것이었다.(이쯤 되면 주인이 아니라 주‘놈’이라 불러도 될 것 같다.) 이 만화의 백미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추격전 씬인데(전자바지 소동 편에서 기찻길 추격전은 시리즈 최고의 장면이다) 역시나 활약하는 것은 그로밋이다. 주인은 같이 추격하다 나가떨어지는 몸 개그 전문 캐릭터지만 강아지 하나 잘 키운 덕에 위기를 모면한다.
당시 일본풍 로봇물과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찌들어있던 본인은 [월레스와 그로밋]의 연출이 선사하는 이질감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던 것 같다.(역시 유럽은 뭔가 다르다. 물론 그때는 월레스와 그로밋이 유럽작품인지 몰랐지만) 이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 감독은 영국의 클레이 애니메이션 거장 닉 파크인데 작품을 스톱모션 촬영을 통해 제작하는 상당한 노가다력(?)을 보여준다. 여러 장의 이미지로 정적인 물체에 운동감을 부여하는 게 애니메이션의 원리인지라 노가다는 필수 불가결한 과정이지만 점토를 빚어 소품을 만들어야하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에선 그 노가다가 배가 된다. 점토를 빚어가며 한 땀 한 땀 사진을 찍었다고 하니 생각만 해도 머리에 쥐가 나지 않는가? 실제로 이 애니메이션은 하루에 6초 분량씩 촬영하였고 한 편을 제작하는데 약 13개월 정도가 소요됐다고 한다.(정말 대단한 노오오오력이 아닌가!) 이렇게 탄생한 화면은 찰흙의 질감 때문인지 액체가 터지는 장면에선 남다른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월레스와 그로밋]은 스토리나 제작방식도 흥미롭지만 이 만화를 얘기하는 데 있어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발명품들을 빼 놓을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 시리즈는 월레스가 침대에서 일어나며 시작되는데 이때 월레스가 침대 옆의 버튼을 눌러 그로밋을 호출하면 1층에서 신문을 보던 그로밋이 기상 자동화 장치를 작동시킨다.(지금 생각해보면 그 버튼을 침대 옆에 만들어 놓으면 될 걸 왜 굳이 그로밋을 시키는지 모르겠다) 이후 침대가 앞으로 튀어나오고 바닥의 통로가 열리며 1층의 식탁 의자 밑으로 월레스가 떨어지고 기계가 자동으로 옷을 입혀주고 식사까지 식탁위에 올려놔준다. 수많은 직장인과 학생들의 과제 중 하나인 아침에 일어나기와 옷 입기를 자동으로 해결해준다니 이정도면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월레스는 발암 유발자이면서 그 나이가 되도록 가정을 못 이룬 중년의 솔로지만 그로밋 덕분에 인생을 참 편하게 살아간다.(가끔씩 말동무도 되니 심심한 것도 해결이 되고 참 좋다) 그러다보니 이 만화는 ‘잘 키운 강아지 열 자식 안 부럽다’는 교훈을 주기도 한다. 필자 역시 애완동물을 키우고 있는데 옆에서 기웃거리는 녀석에게 [월레스와 그로밋]을 떠올리며 “아침! 오늘은 네가 밥 당번이잖아”라고 말을 걸어본다. 역시나 어리둥절한 녀석의 눈빛만이 돌아온다.
‘만화는 만화일 뿐 따라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