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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유로운 주말 오후, 후배 하나를 꼬셔서 동네카페에서 같이 공부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 책을 펴놓기만 하고 나는 계속 딴 짓을 하고 있었다. 반면에 근면, 성실의 아이콘인 후배는 역시나 착실하게 대기업 인적성 시험 문제를 풀고 있었는데 문득 낮게 중얼거렸다.

 ㅡ 똘기떵이호치새초미 자축인묘...
 ㅡ 뭐하냐?
 ㅡ 12간지 빈칸 채우는 문제, 이거 형도 알잖아요.
 ㅡ 오오!

 부연설명을 안 해도 후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감이 왔다. 그렇다! 오늘 주제는 바로 꾸러기수비대다. 동화나라를 배경으로 12간지 동물들이 주인공이자 오늘날의 20대가 만화 오프닝 하나만으로도 자연스럽게 12간지를 줄줄 외우게 만들었던 희대의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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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꾸러기수비대는 원제가 ‘12전지 폭렬 에토레인저(十二?支 爆烈エトレンジャ?)’다. 1995년 작이고 우리나라에는 1996년 KBS2TV에서 꾸러기수비대 라는 이름으로 방영 했는데, 잘 알듯이 동화나라를 배경으로 마녀 헤라의 음모를 저지하려는 12간지 동물들의 스토리다. 동, 서양의 동화, 민담, 설화를 주제로 한 만화답게 첫 화도 우리가 잘 아는 12간지 설화에서 시작된다. 12간지 순서를 정하는 달리기 시합에서 악마 마라에게 속아 본의 아니게 부정출발을 하게 된 고양이 쿠키는 억울함에 마녀 헤라로 흑화해 동화나라 ‘원더랜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이에 첫 번째 서열인 똘기를 위시한 12 동물정령 멤버들이 목마형 전함 ‘알바트로스’를 타고 동화나라를 모험하는 스토리가 이 만화의 골자.

 12지 전사들의 임무는 악당들의 음모로 왜곡된 동화에 개입해서 원래 이야기대로 돌려놓는 것이다. 예를 들면 ‘토끼와 거북이’는 달리기가 카레이싱으로 바뀌어져 있고 브레멘 음악대는 브레멘 밴드로 바뀌어져 있다. 벌거벗은 임금님은 노출을 해야 하는데 추위 때문에 옷을 전혀 벗지 않는다. 동화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원흉인 블랙전사들은 각 동화 속 등장인물로 숨어있고 꾸러기 수비대는 요지경이라는 탐색 및 동료 소환 아이템을 활용하여 블랙전사를 찾아내고 퇴치해야 한다. 

 의외로 어린이들이 주연령층인 만화임에도 꾸러기수비대의 전개는 상당히 비장하게 흘러간다. 마녀 헤라와 사천왕의 합세, 그리고 만악의 근원인 마라의 개입으로 12지 친구 중 아홉 명이 전사한다. 최종보스 마라를 상대로 마지막 화까지 생존한 건 12지 전사들의 리더 똘기(쥐)와 비전투원인 새초미(토끼), 찡찡이(돼지) 뿐이라는 절망적인 전개로 이어진다.

 소년만화의 법칙은 여기서도 적용된다. 동료들은 다 죽고 최종보스와의 압도적인 전투력 격차로 홀로 고군분투하던 똘기는 필승의 키워드, “추억, 희망, 미래, 포기하지 않아”로 대표되는 대사들을 외치면서 대각성을 하게 되고 그 힘으로 죽은 동료들까지 부활시킨다. 똘기의 각성에 의해 부활한 12지 전사들은 최종보스를 둘러싸고 12대 1로 ‘힘을 모아’ 싸우는데...... 사천왕 둘이서 우리 동료 하나를 ‘다굴’하는 건 ‘비겁하다!’ 했던 똘기의 모습은 상당히 모순적이지만 아무렴 어때. 다굴의 명분은 오직 정의의 편에게만 있으며 어찌됐건 합법적인 린치로 꾸러기수비대는 세상을 구하게 된다! 원더랜드는 다시 평화를 찾고 고양이 쿠키는 그간의 죄를 속죄하러 여행을 떠나게 되며 그간의 공을 인정받아 꾸러기수비대들의 모험담은 또다른 하나의 동화로 인정받게 되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물론 단순한 해피엔딩이긴 하지만 이 만화가 끝났음을 종언하는 똘기의 마지막 대사를 같이 생각해보면 상당히 근사한 결말이다! 토요일에 연재되는 ‘감탄고토’처럼 표현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기억에 남는 말]
 만약 여러분이 도서관 책장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책을 발견한다면 그건 어쩌면 우리의 이야기일지 몰라요. 그 책의 첫 장을 넘기시면 언제든지 우리를 만날 수 있어요. 바로 그때부터 우리의 모험이 시작되는 거랍니다. 

 12지 친구들의 모험담이니 당시 시청자들이었던 어린이들은 본인들의 띠에 맞춰서 캐릭터들을 응원하곤 했다. 그런데 9살 용띠소년이었던 나는 드라고를 응원할 법했지만 남자따위 안중에도 없었고 토끼 새초미가 나오기만 바랐다. 지금도 정확히 기억나는 게 ‘토끼와 거북이’ 편에서 새초미는 토끼를 꼬시려고 바니걸 복장을 입었는데 그 차림은 9살 소년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이 감정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 평생 이 장면을 기억하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이 만화가 12간지 얘기도 나오고 동화 얘기도 나오니 그저 EBS 교육만화일 줄 알았던 엄마는 새초미의 헐벗다시피한 바니걸 차림을 보더니 무정하게 채널을 돌렸던 기억이 난다.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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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나도 그렇고 소년들이 대체로 여성미가 넘치는 새초미 팬이라면 소녀시청자들은 대부분 터프한 누님 타입의 암탉전사 키키를 좋아했다. 최근 매드맥스도 그렇고, 여자들은 독립적이고 강인한 여전사 타입을 동경하는 거 같다. 

‘새초미는 애가 싸움도 못하면서 예쁜 척만 하고. 별로야.’
‘응, 키키가 진짜 멋있고 예쁘지.’
‘결정적일 때 도움도 되고.’ 

 언젠가 술자리에서도 꾸러기수비대 얘기가 나왔었는데 여자사람친구들은 다 키키가 훨씬 예쁘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저 바니걸 차림의 새초미가 기억에 남는다는 말만 했을 뿐인데 
‘거 봐, 남자들은 그저 예쁜 여자가 벗으면 다 좋지?’
라는 오해 아닌 오해에 엄청 주눅이 들어있었다. 그렇게 나를 힐난하면서 암탉전사 키키의 쿨함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여자사람친구들은 맥주를 마시며 ‘치킨 모가지’를 질겅질겅 씹어대고 있었는데 그 광경이 상당히 묘했었다. 
 니들이 씹고 있는 그 모가지가 키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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