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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속의 산재처리

- 4 -

 

대구 이야기

 

 

 정확히 삼일 뒤 그는 대구로 내려갔다. 삼일동안 베개도 없이 잠을 잘 잤다.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었다. 대구는 생각보다 덥지 않았다. 대구에서 해야 할 일은 운전이었다. 아버지가 소개해준 가게에서 유제품이 가득 찬 탑차를 모는 그의 인생은 그저 평온했다. 생각은 그렇게 많이 필요 없었다. 학원을 왔다 갔다 하듯이 거래처를 왔다 갔다 했다. 매일은 반복이었다. 반복의 묘미는 일정 수준까지는 나아진다는 점에 있다. 나아지는 수준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반복도 재미가 있다. 반복은 상식을 만들었다. 그의 상식은 더욱 완성이 되었다.

 

대구역간장게장-01.jpg

 

 

 그는 열심히 일을 배웠다. 그의 아버지가 하는 일은 대리점과 본사 사이를 연결하는 도매상이었다. 일이 힘든 것은 신체적인 어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평생 을이었던 자신이 갑이 되어 을에게 설움을 안겨주는 것이 힘들었다. 자신이 을이었기에 그들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더욱 힘들었다. 힘든 것은 잠시였다. 상식이 된 반복이 그를 무디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찍어 준 소매점에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유제품을 떠맡기곤 했다. 을들은 역시나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소매점에 일하는 직원들이 가끔씩 그에게 봉투를 찔러 주곤 했다. 봉투의 액수에 따라서 그가 다시 그 양을 조절했다.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거래처 사람들과 술을 마셨다. 운전을 하고,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고 무뎌졌다. 서울에서 살았던 고시원 기억이 희미해질 때 쯤 그는 다시 여자 친구도 사귀었다.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임용고시를 합격한 여자였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새어머니와 살았지만, 모난 구석이 하나 없는 수더분한 여자였다. 얼굴이 예쁘지는 않았다. 다만 노력으로 예뻐질 수 없는 종아리가 예뻤다. 이 여자와 살면 행복은 아니어도 불편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의 새어머니는 이 결혼을 환영했다.?그의 아버지도 찬성했다. 결혼 선물로 집은 물론 벤츠도 사주었다. 그는 좋았다. 그러나 그는 좋기만 했다. 며칠 뒤 그는 전화 한통을 받게 된다.

 

 

 “안녕하십니까. 여기 서울 종로서 형사 서복만입니다. 지난주 수요일에 양선재씨 만나셨죠? 무슨 일로 만나신겁니까?”

 “선재요? 중학교 동창이라 오랜만에 만나서 옛날이야기 좀 했어요. 그건 왜 물으시죠? 선재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양선재씨는 지금 전여자친구와 그 어머니를 살인했습니다. 아직 언론에 보도되기 전이니까 비밀 유지 하셔야 합니다. 방금 붙잡았는데 통 입을 열지 않아서요. 수첩에 약속시간과 이름 연락처가 기록 되어 있어서 연락 드렸습니다.”

 “저는 선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다신 전화 걸지 말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아아 복잡하거나 서울에 오시거나 안 그러셔도 됩니다. 한 가지만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당신과 만난 뒤 살인 사이에 일곱 시간이 비어있어요. 혹시 그것에 대해서 피의자가 말한 거 없어요?”

 “아니요. 없습니다. 전 모릅니다.”

 “피한다고 피해지는 일이 아닙니다. 범죄 자체는 명확한데, 동기나 사건과정이 불분명해서 그래요. 혹시 왜 그랬는지 압니까? 이 친구 불쌍한 친구던데, 당신 이 사람 친구 아닙니까? 당신의 증언이 양선재씨한테 도움이 될 수 있어...”

 

 

 그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전화기가 다시 울렸다. 그는 전화기를 꺼버렸다. 대구로 내려오면서 끊기로 마음먹었던 담배를 샀다. 편의점 파라솔 밑에 앉아 피우려고 시도했다. 담배 비닐 포장이 잘 벗겨지지 않았다. 이까지 사용해서 가까스로 포장을 뜯었다. 담뱃갑에 새겨진 mevius를 보자 현기증이 일었다.

 

 

 선재의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힘겹게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선재와의 만남을 다시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는 선재가 어째서 자신을 만나자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선재의 기묘한 섬뜩함 때문에 피했던 것이 후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재는 곧 터질 것 같은 폭탄이었다. 그는 그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선재와 같이 점심이라도 먹었다면 아마 그런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마지막 말이 힌트였다. 지금 그의 머리를 지배하는 궁금증은 선재가 사장이 아니라 소꿉친구를 죽인 이유였다. 모든 원인은 사장 때문에 그러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랑했었던 여자를 죽이는 일은 정상적인 결정이 아니다. 어차피 사람을 두 명이나 죽인 살인자를 무뎌진 자가 이해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누군가를 죽여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적은 두 번쯤 있었다. 한번은 네가 멍청해서 어머니가 불쌍하다는 말을 고등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들었을 때였다. 그가 지금 생각하기에 아마 그 선생님은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였다. 것이다. 공부를 하지 않는 학생이 충격을 받으면 공부를 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런 말을 했다. 그러나 그 말은 그의 가슴속에 아직까지 남아있다.

 두 번째 대상은 또 다른 선생님이었다. 그 선생은 대학교의 교수였다. 그 교수는 같은 학교 씨씨였던 그의 여자 친구에게 한번 잠을 자면 학점을 잘 주겠다고 꼬드겼다. 울면서 그 이야기를 하는 여자 친구를 꼭 안아주면서 그는 교수를 죽이겠다고 내뱉었다. 결국 그는 그 교수를 죽이지 못했다. 여자 친구를 볼 때 마다 교수가 떠올랐다. 그는 별 볼일 없는 남자였다. 그렇게 여자 친구와 지지부진하게 헤어지고 말았다.

 

 

 선재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섹스 하지 못하는 삶은 의미 없어.’ 갑자기 여자 친구가 보고 싶어졌다.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업이 끝나고 새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다음날은 스승의 날 전날이라 수업이 없었다. 둘은 경주로 여행을 가기로 하였다. 그는 여자 친구를 만나서 계란 후라이가 고명으로 올라간 자장면을 먹고, 벤츠를 타고 김유신 장군묘를 구경하러 갔다. 그리고 경주에 힐튼 호텔에서 묵었다. 그는 호텔 방에서 여자 친구와 두 번 했다. 여자 친구는 그날따라 더 힘들어 했다. 허탈하고도 또 허탈했다. 선재는 행위에서 어떤 의미를 찾았을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가 앞으로 물어볼 일은 없을 것이다.

 

 

 다음날 느지막이 깨어나 체크아웃을 하고 간장게장을 먹으러 갔다. 게의 집게를 빨며 식당에 있는 티비를 보았다. 그날 정오 뉴스의 첫 번째 헤드라인은 탄핵심판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간장게장 국물에 그의 환한 미소가 비쳤다.

 

대구역간장게장-0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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