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시칼럼 - [김유신 - 그가 사는 방식]

by 호솜 posted Sep 0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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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2, 금관가야가 멸망한다. 신라는 항복한 금관가야의 왕 구형왕을 진골에 편입시켰고, 왕족들은 신라의 귀족으로 새출발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우가 같을 리는 없었다. 이들을 신김씨라 부르며 기존의 진골들과 구별한 것이다. 구형왕의 손자인 김서현은 성골이었던 만명부인과 사랑에 빠졌는데 부모의 반대로 사랑의 도피를 해야 했다. 결국 둘의 사이를 인정받게 되었는데 그들이 낳은 아들이 바로 김유신이다.

 

609, 그의 나이 15살 때 화랑이 됐고, 2년만에 화랑의 총지휘관인 국선이 된다. 천관녀 설화를 생각하면 이 과정에서 큰 결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는 곳곳에서 큰 공을 세우며 승진을 거듭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김춘추에게 손을 내밀게 된다. 축국 놀이를 하다 일부러 김춘추의 옷을 찢어 고쳐주겠다면서 누이 문희와 합방시킨 것이다. 문희의 임신을 김춘추가 모른척 하자 선덕여왕이 지나가는 길에 불태워 죽인다는 시위까지 했고 결국 선덕여왕의 중재로 결혼시키게 된 것이다.

 

이것이 처음부터 두 사람의 작전이었는지, 김유신 혼자의 계획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혹은 김유신과 선덕여왕의 계획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김춘추가 이 일로 화가 나서 10여년간 김유신을 멀리했다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둘은 결국 손을 잡게 된다. 당시 성골은 수가 극히 줄어서 2번 연속이나 여왕을 세워야 했다. 여권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인 신라에서 어떻게든 정통 성골을 세우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씨가 끊겨 버렸고, 이제 진골 중에서 뽑아야 했다. 김춘추에겐 힘이 필요했고, 김유신에게는 왕이 될 동지가 필요했다.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이 심해지던 그 때 외교와 군사의 실력자들이 손을 잡은 것이다. 김춘추는 왕이 됐고 온갖 외교전으로 당나라를 끌어들였고, 김유신은 전장을 누비며 백제와 고구려를 상대한다.

 

그리고 660년 황산벌, 오랜 원수 백제를 멸망시키는 전투였다. 김춘추가 온갖 노력을 해서 십삼만이나 되는 당군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이에 맞춰 신라도 김유신, 그의 아우 김흠순, 진골 귀족이었던 김품일을 파견했고 여기에 다음 왕위를 이을 김법민까지 보냈다. 그야말로 총력전이었던 것이다. 오만의 대군, 당시 신라가 뽑을 수 있는 한계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대군이 계백의 결사대에 막혀버린다. 4차례나 공격했지만 패했고, 당군과 합류할 시간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김유신은 아우 김흠순과 김품일을 부른다. 김품일은 대야성에서 죽은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의 아우였다. 김유신은 이들에게 어떤 명을 내렸고, 이들은 각자의 아들을 부른다.

 

"신하에게는 충성만한 것이 없고 자식에게는 효도만한 것이 없다. 이렇게 위급할 때에 목숨을 바친다면 충과 효 두 가지를 다하게 되는 것이다" - 김흠순

"내 아들의 나이가 겨우 열여섯이지만 의지와 기개가 자못 용감하니, 오늘의 싸움에서 삼군의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김품일

 

흠순의 아들 반굴, 품일의 아들 관창, 둘 다 진골 귀족이다. 이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린 것이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단기돌격은 아니었지만 소규모 부대의 결사돌격이었던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반굴은 가서 죽었고, 관창은 포로가 돼서 풀려났지만 다시 돌격해서 죽었다. 김품일은 돌아온 아들의 목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아이의 얼굴이 마치 살아있는 것 같구나. 임금을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스런 일이로다"

 

이런 자살돌격은 김유신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 역시 젊은 날 패색이 짙자 단기로 돌격, 적장 셋의 목을 베어와 전세를 뒤집었고 역시 백제와의 전투 중 휘하 장수 비령자에게 돌격을 명했다. 비령자는 기꺼이 가서 죽었고 그의 아들 거진과 종 합절까지 돌격해 전사한다.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전장은 다르지만 부자가 같은 운명을 맞이한 일이다. 반굴의 아들 김영윤이다. 신라는 고구려인들을 받아들이며 보덕국을 세웠고, 왕족 안승을 왕으로 세운다. 이후 안승은 신라 귀족에 편입됐고, 끈 떨어진 보덕국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김영윤은 토벌에 참전하면서 이런 말을 남긴다.

 

"내가 이번에 가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좋지 못한 소문이 들리지 않도록 하겠다"

 

반란군의 기세는 상당했고, 다른 장수들은 잠시 후퇴하려 했다. 이 때 그가 반대하면서 자기 부대만 이끌고 돌격, 전사한다. 그 이유를 묻는 종에게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임하여 용기가 없는 것은 예경에서 경계한 바이고, 전진이 있을 뿐 후퇴하지 않는 것은 사졸로서 지켜야 할 당당한 본분이다. 장부가 일에 임해서는 스스로 결정할 것이지, 어찌 꼭 무리의 의견만을 따르겠는가"

 

전쟁터에서는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위의 반굴, 관창이나 이 영윤의 말은 그 수준을 뛰어넘는다. 열심히 싸우는 걸 넘어서 아예 죽으러 가는 느낌이 들고, 실제 죽었다. 그것도 김춘추나 김유신 등 신라의 최고위와 연관돼 있는 젊은이들이 말이다.

 

화랑도는 신분갈등을 완화하는 제도라는 평가를 받는다. 귀족들이 화랑이 되어 평민인 낭도들을 이끌며 열심히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상류층의 결사돌격의 효과는 컸을 것이다. 살아서 이기든 죽어서 돌아오든 말이다.

 

여기서 원술랑 얘기로 가보자. 이렇게 귀족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치는 나라에서, 그걸 가장 앞장서서 하던 김유신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 신라군이 대패하고 다른 장수들이 다 죽었는데도 말이다.

 

"당나라 사람들의 계략을 예측할 수 없사오니 장졸들을 시켜 제각기 긴요한 곳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다만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훈마저 저버렸으니 목을 베어야 할 것입니다"

 

문무왕이 반대해서 목숨은 건지지만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게 된다. 아버지는 그를 버렸고, 아버지가 죽은 후에 찾아간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부인에게는 삼종의 도리가 있다. 이제 내가 과부가 되었으니 마땅히 아들을 좇아야 할 것이나, 원술과 같은 자는 이미 돌아가신 아비에게 자식 노릇을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그의 어미가 될 수 있겠는가"

 

원술은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담릉 때문에 일을 그르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계속 은둔하다 매소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벼슬을 거부하고 다시 은둔하다 죽는다. 그가 부모에게 다시 인정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렇게 한에 쌓인 채 죽은 것이다. 이것이 김원술, 원술랑의 이야기이다.

 

김유신으로서는 절대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원술은 거기서 죽었어야 했다. 피로 올라온 그 자리, 그것도 자기 친척들을 죽여 가며 올라왔던 그 자리였다. 족보도 없는 가야 출신 귀족,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큰 공을 세워야 했고 그 누구보다도 귀족다워야 했다. 이걸 이루지 못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식이라도 거부해야 했다.

 

화랑도의 세속오계 중에 임전무퇴가 있다. 이는 죽을 각오로 싸우라는 말이 아니다. 이기지 못 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말라는 말이다. 적어도 김유신의 가족들에겐 그랬을 것이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말이다. 비극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그 때 그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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