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 7월 16일, 거제도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은 대패한다. 백 척을 훌쩍 넘기는 대군이 전멸한 것이다. 이를 발판 삼아 일본군은 진격을 개시하니 정유재란의 시작이다. 일본군의 주요 목표는 전라도였다. 임진년에 8도 중 전라도 공격에 실패했고 이건 일본이 패배한 치명적인 이유 중 하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부터가 전라도는 빠짐없이 공략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잔인한 코베기 역시 전라도에서 행해졌다. 그나마 있는 관군과 의병, 명군은 남원성, 전주성 등에서 소수로 맞서다가 전멸했다.
전라도를 초토화시킨 일본군은 충청도로 진격을 개시했다. 역시 쾌속진격이었다. 4천의 명군이 이들을 요격하면서 직산 전투가 일어났고, 적의 예봉을 꺾는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명군 역시 물러났고, 일본군은 다시 북진을 개시했다. 한양에서는 왕의 가마를 지는 하인들까지 도망쳤고 선조가 명군이 도망가지 않을까 걱정했으며, 명군 대장 양호가 직접 한양을 사수하겠다는 다짐을 해야 할 정도였다. 일본군은 계속 진격해오고 있었고, 희망은 없어 보였다. 임진왜란 때 평안, 함경도까지 진격한 것 때문에 정유재란의 진격은 가벼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 때가 더 위험했다. 임진왜란 때와는 상황이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임진년에 일본군은 그저 왕만 보고 달렸다. 때문에 진격은 빨랐지만 교두보인 경상도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 할 정도였다.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들은 곳곳을 찔렀고, 김시민을 비롯한 관군들도 성을 탈환하고 적의 대군까지 막아냈다. 다른 도에서도 의병들이 일어났고, 함락되지 않았던 전라도의 관군과 의병은 서울까지 진격할 정도였다. 일본군이 경상도로 총퇴각을 한 건 옳은 판단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국 어디서든 겨울의 추위 속에 각개격파 당할 운명이었다.
명군의 증원 역시 컸다. 조선군이 각 도에서 싸우는 동안 명의 대군은 평양성을 탈환했고, 일본군을 남으로 밀어붙였다. 벽제관에서의 대패가 있었고 조선을 무시하고 일본군과 강화를 맺긴 했지만 명의 대군과 참전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일본군에게는 크게 다가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큰 조선 수군의 활약으로 보급선이 끊긴다. 4차 출동인 부산포 해전이 아니더라도 조선 수군은 출동할 때마다 부산과 김해 등 적의 후방을 계속 노렸다. 히데요시가 해전을 금지할 정도였고, 이런 상황에서 전방으로 물자 수송은 불가능했다. 육로를 통한 수송은 열악했고, 평양을 넘어 히데요시가 원하는 명나라로의 진격을 위해선 바다를 통해 물자를 수송해야 했다. 조선 수군은 그걸 완전히 끊어버린 것이다.
정유재란 때는 그 수군이 전멸했고, 의병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으며, 소수의 조선군은 성에 틀어박혀 있었다. 명이 재차 파병하긴 했지만 이 당시에는 만 명 정도였고 그나마도 전라도에서 각개격파당해 얼마 남지 않았다. 일본군이 그대로 진격해오고 전라도 바다를 통해 임진년에 못 한 보급까지 성공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일본군은 더 이상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저 경상, 전라, 충청, 강원의 4도만을 요구했고 그럴 정도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조선도 명도 그걸 막을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9월 16일 이후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진도 앞바다 명량에서 있었던 해전 덕분이다.
당시 조선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다뤄보았다. 그렇다면 당시 조선 수군의 상황은 어땠을까? 칠천량 해전은 시간이 갈수록 전멸이 아닌 전면도주로 밝혀졌다. 원균부터가 도망갔으며, 휘하 장수와 군사들도 배를 버리고 도망쳤다. 그나마 전사한 걸로 파악된 건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 조방장 김완 정도였다. 그런데 김완도 일본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것으로 밝혀졌다. 패배의 규모에 비해 전사자는 극히 적은 해전이었다.
이 때 탈출한 대표적인 무장인 경상우수사 배설부터 다른 장수들도 패배주의에 빠져 있었다.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그렇게 허무한 피해를 입었고 임진년과는 비교도 안 될 대규모의 적이 몰려오고 있었으니까. 이들은 새로 통제사에 임명된 이순신을 만나 의지하고 다시 싸울 것을 기약했을 것이다. 하지만 적이 야습을 해오자 다시 도망쳤고 이순신이 직접 맞서 싸워야 했다. 명량해전 당시에도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뒤로 물러났고, 이순신이 한참을 버티고 나서야 하나둘씩 참전했다. 장수들이 이런데 병사들은 어땠을까?
백성들은 어땠을까? 수군은 신량역천 중 하나로 양인이지만 천민 수준의 역을 졌기에 기피대상이었다. 낭만적으로 묘사되는 대항해시대도 바닥까지 떨어진 인생을 역전하기 위핸 참가한 이들이 많았고, 세계 최강이었던 영국 해군도 항구의 술집을 덮쳐 해군을 충원해야 될 정도로 기피대상이었다. 여기다 조선은 유교의 나라인만큼 죽으면 시체도 못 찾는다는 공포가 컸다. 이렇기에 수군은 전성기 때도 병력을 모으기 힘들었고, 이순신도 나라의 명을 반대하며 사람들을 억지로 끌고 가야 했다. 그랬던 백성들이 정유년에 오니 조선 수군을 따라다녔다. 나라의 상황이, 백성들이 느낀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들을 묶어주는 이는 단 하나, 충무공 이순신이었다. 그럼 그의 상황은 어땠을까? 역시 최악이었다. 잘못한 게 없음에도 고문을 받았고,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 동안 쌓은 충성이 모두 부정당했으며, 모든 명성과 직책을 떼인 체 백의종군해야 했다.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는 상주의 몸으로 단 며칠도 있지 못한 채 먼 길을 떠나야 했다. 이후 난중일기에는 죽고 싶다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그에게 조선 수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자신을 모두 던져 키웠던 조선 수군이 말이다. 그에게 수군 전멸을 전하러 온 권율은 새벽부터 낮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가 받은 대접을 알고, 누가 맡든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았기에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은 그걸 아무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그는 상 중이었기에 나라의 부름을 거절할 수 있었다. 단 한번만 거절해도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고민 없이 받았고, 바로 길을 떠났다. 바로 그 날 일본군은 진주를 점령했다. 이순신이 통제사에 재임명된 곤양과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그 후에도 그는 일본군이 점령해 가던 전라도를 돌아다니며 병력과 물자를 모았다. 여기서 적과 한 번이라도 마주쳤으면 역시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수군을 다시 모았고, 도망치려는 장수와 군사들을 독려했다. 싸울 때마다 선봉에 나서 적을 격퇴했고, 대군과 맞설 최고의 장소를 선택했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고 부하들이 도망갈 때에도 끝까지 맞서 싸웠고, 마침내 승리했다.
그렇다고 그의 고난과 슬픔이 끝난 게 아니었다. 전투가 끝난지 얼마 안 돼 아들의 죽음을 들었다. 그렇게도 아끼던 아들의 죽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무너지지 않고 수군을 재건했고, 다시 진격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수군의 후퇴를 틈타 서해로 진입했지만, 곧 포기하고 만다. 단 13척도 상대하지 못한 상황에서 더 이상의 진격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이후 수군이 재건하면서 일본은 더 이상 바다에서 조선 수군을 상대하지 못 했고 왜성에 웅크려서 조선 수군이 쏘는대로 맞을 뿐이었다. 그랬던 일본군이 마지막으로 시도한 대규모 해전에서 큰 별이 지고 말았지만...
영웅사관은 현대에 들어 많은 비판을 받는다. 시대의 흐름보다 한 사람의 능력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사람이 없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는 특이한 경우를 찾을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이 그런 경우이다. 판옥선과 화포의 이점 등 고려할만한 상황은 많다. 이순신이 혼자서 적을 막은 건 아니기에 말이다. 하지만 조선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있던 그 시점, 이순신이라는 한 사람의 힘은 너무나도 컸다. 여기에 수군을 재건하고 공세로 전환했던 것까지 생각하면 말이다.
충무공 이순신, 그에 대해서 말하자면 여기 담기엔 너무도 많은 말과 종이가 필요할 것이다. 그저 이 한마디만 하고 싶다. 이렇게 우리가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영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역사는 충분히 자랑스러운 게 아닐까?